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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화문(敦化門).서울 창덕궁 본문

☆~ 바람소리/궁궐(宮闕)

돈화문(敦化門).서울 창덕궁

푸른새벽* 2007. 1. 12. 23:28

 

돈화문(敦化門)


창덕궁의 정문은 돈화문(敦化門)이다.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으로 남향 건물이다.좌우 양쪽의 협칸을 벽체로 막았으나,우리나라 궁궐 대문 가운데 정면이 5칸에 이르는 문은 돈화문밖에 없다.태종 12년(1412)에 창건된 이 문은 창경궁의 정문 홍화문(弘化門)과 더불어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이 보존되어 있는 궁궐 정문으로 중시되고 있다.즉,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창덕궁을 중건하기 시작한 선조 40년(1607)에 가장 먼저 복구되었는데 이때의 건물 모습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것이다


창건 당시 돈화문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점차 개축되면서 현재의 규모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태종 13년에는 돈화문에 무게 1만 5000근의 동종(銅鐘)을 걸고 아침저녁으로 인경을 쳤다는 기록이 있다.그 종에는 태종의 공덕을 글로 새겼다고 한다.문종 연간에 돈화문을 개구(改構)하라는 어명이 있었고 연산군 12년에도 돈화문을 개조하여 고대(高大)케 하라는 어명이 있었다.이궁으로 창건 되었던 창덕궁의 활용 빈도가 높아지면서,외국의 사신이 임금을 알현(謁見)하거나 국상이 났을 때 상여가 나가야 하는 등,궁의 정문을 더욱 위엄 있게 조성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광해군 때의 중건 이후에는 경종 연간에 보수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1890년 경에는 왕실에서 자동차를 사용하면서 차량이 드나들 수 있도록 문지방을 빼고 끼울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한다


돈화문은 그 위치기 궁궐의 서남쪽 모퉁이에 치우쳐 있다.이는 창덕궁의 지세가 동서로 길게 평지가 이어지면서 그 앞쪽과 뒤쪽에는 언덕이 펼쳐지고 있는바,그 지형 조건에 맞추어 건물을 배치하였기 때문이다.돈화문 건물은 중층의 우진각 지붕에 겹처마,다포계 양식의 집으로 장대석 세벌대로 쌓은 기단위에 높이 세웠다.기단 앞에 설치한 넓은 돌계단은 가운데 양쪽으로 소맷돌을 놓아 어계(御階)를 형성함으로써 셋으로 구획하였다.이 어계는 아래 기단 중앙으로 난 어로(御路)와 이어지지만 서수나 답도는 놓지 않았다.일제 시대에 자동차가 드나들기 힘들다는 이유로 기단을 흙으로 덮었던 것을 최근에 복원하였다


「東闕圖(동궐도)」에는 아래 기단 바깥쪽으로 말고삐를 매던 목마자(木馬子)와 노둣돌(下馬石) 두 개씩이 묘사 되어 있다
또한,「동궐도」에는 돈화문의 지붕이 팔작 형태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화원(畵員)의 실수인지 그림을 그린 이후 지붕 모양이 바뀐 것인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기단 위로는 둥글게 다듬은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다.건물 앞뒤로 각각 6개씩의 평주(平柱)를 세우고 그 가운데 4개의 네모난 고주(高柱)를 배열하여 그 사이에 거대한 판문(板門) 두 짝씩을 걸었다.기둥머리에는 창방과 평방이 결구되었고,그 위에 내삼출목 외이출목의 공포를 짰다.아래위층이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돈화문의 공포는 안쪽 3제공부터는 끝이 운궁(雲宮)이라고 부르는 둥글둥글한 장식으로 되어 기둥 사이에서는 천장에까지 이르렀고 보 아래에서는 보아지가 되었다
이러한 공포의 특징은 돈화문이 17세기 초에 세워진 것임을 뒷받침한다.건물 뒷면 양쪽에 단 나무 계단을 올라 위층에는 장마루가 깔려 있다.위층은 바깥 기둥과 아래층에서 뻗어 올라온 고주로 축부를 구성하였으며 연등 천장으로 마감하여 사람이 서서 활동하기에 충분한 트인 공간을 확보하였다.위층 네 면의 벽 부분에는 널판문을 설치하였고, 그 바깥면으로는 모두 태극 문양을 그렸다.양성을 한 각 지붕 마루에는 취두와 용두,잡상을 배열하여 장식하였으며, 사래 끝에는 토수를 끼웠다
*이덕수 지음 '新궁궐기행'중에서*

 

돈화문(敦化門)


보물 제383호

 
돈화문은 조선시대 5대 궁의 하나인 창덕궁의 정문이다.


조선 태종 12년(1412)에 세웠으며 임진왜란 때 불 타 버린 것을 광해군 즉위년(1608)에 창덕궁을 다시 지으면서 문도 함께 세웠다. 지금 있는 건물의 앞쪽은 도로포장공사로 지면이 높아져 약간 묻혀 있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2칸의 2층 건물이며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다. 지붕 무게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1층 5칸 가운데 3칸은 2짝씩 문짝을 달았지만 양쪽 끝칸은 모두 벽을 쳐서 실제로 3칸만 이용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태종 13년(1413) 문에 동종(銅鐘)을 걸었다는 기사가 있다. 문에 종을 걸었다는 것은 보기 드문 예라 할 수 있지만, 지금 있는 문은 다시 세운 것이므로 실록을 통해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돈화문은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과 함께 조선시대 궁의 위엄을 살리기 위해 세운 문루의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건축물이다. 
*문화재청자료*

 

 

 

 

 *창방.평방의 단청과 공포와 편액

아기자기한 질서가 마치 목조 공예인 양 아름답다.위층의 벽 부분 네 면에는 널판문을 달고 그 바깥 면에 삼태극 문양을 채색하였다

 

 

 

 

*돈화문의 추녀와 처마선

아래 위층 모두 창방 위에 평방을 다시 얹고 그 위에 다포 양식의 공포를 짰으며서까래에 부연을 덧얹은 겹처마로 마감하였다. 전통 목조 건축에서는 처마가 처져 보이는 착시 현상을 후림 및 조로 기법으로 바로잡았다.또한,앙곡을 잡아주기 위해 추녀 부분의 서까래를 펼친 부챗살 모양으로 배열했는데 이를 선자서까래라고 한다

 

 

 

 

*우물마루로 마감한 돈화문 아래층의 천장

위층은 연등천장이다.공포를 장식한 운궁이 기둥 사이에서는 천장에까지 이르렀고 보 아래에서는 보아지가 되었다.자세히 보면 촘촘한 그물 모양의 망을 쳤는데,비둘기등 날짐승이 들지 못하도록 하는 부시이다

 

 

 

 

*아래 기단으로 오르는 돌계단의 소맷돌

설질적인 정궁 역할을 한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으로 오르는 계단 소맷돌로는 어딘지 모르게 투박하다.돈화문 앞 아래 기단은 일제 강점기에 자동차가 드나들기 힘들다는 이유로 흙으로 덮어 도로화하였던 것을 최근에 복원하였다

 

 

 

 

*창덕궁 서쪽의 금호문(金虎門)

금천교를 사이에 두고 진선문과 마주보고 있으나 그 축은 어긋나 있다 .『宮闕志』에 의하면, 금호문에는 영군직소(營軍直所) 31칸 반이 부속 되어 있었다.1926년 4월 28일, 순종의 성복제(成服祭)에 송학선(宋學先)의사가 사이토를 암살하려다 실패한 현장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