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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昌慶宮).서울 종로 본문
창경궁(昌慶宮)
창경궁(昌慶宮)은 성종 14년(1483),옛 수강궁(壽康宮)자리에 창건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에 준공되었다.별궁으로 건립되었는데,당시의 3대비 즉,세조의 비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와 추존 왕 덕종의 비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 그리고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安順王后) 한씨를 모시기 위함이었다.이들은 성종의 할머니,어머니,작은어머니였다.창경궁을 짓기 전의 수강궁은 태종이 1418년에 양위를 하고 세종이 등극하면서 그 해 11월 지금의 명정전 일대로 추정되는 곳에 태종이 거처할 궁으로 건립했었다.태종의 비 원경왕후(元敬王后)가 이곳에서 승하하였으며 이후 단종이 즉위하여 잠시 수강궁으로 거처를 옮기기도 했다.세조는 수강궁에서 승하하였으며,세조가 승하하기 하루 전에는 예종이 수강궁에서 즉위하였다.'수강'이라는 궁호는 『書經(서경)』 「洪範(홍범)」의 '日壽日康(일수일강)'에서 따왔다고 한다
성종 때의 창경궁 창건은 수렴청정을 했던 대왕대비 윤씨가 거처를 수강궁으로 옮기기 원한데서 비롯되었다.공사의 책임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이극배(李克配)등이 맡았다
창경궁은 창건 이후 초기에는 상대적으로 그 활용도가 낮았다.그러나,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이 중건되지 않고 창덕궁과 창경궁만 재건되어 창덕궁이 정궁 역할을 하게 되면서 인접해 있는 창경궁도 왕실의 생활 공간으로 그 활용 빈도가 높아졌다
창경궁 역시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전소되었다가 광해군 8년(1616)에 중건되었으며 인조 2년(1624)에는 이괄(李适)의 난으로 통명전.환경전.양화당 등 내전의 대부분이 불에 타는 수난을 당했다.이때 소실된 전각들은 인조 11년(1633)에 중건되었다
19세기 들어 순조 30년에 창경궁은 다시 큰 화재를 당한다.환경전에 불이 나 함인정.경춘전.숭문당.영춘헌 등으로 번지면서 대부분의 내전 전각들이 소실되었으며 그 중건은 그해 즉시 숭문당을 상량한 것을 시작으로 함인정.환경전.경춘전은 순조 33년에,통명전.양화당은 순조 34년(1834_에 마무리되었다.현존하는 내전 전각들 대부분은 이때 건립되었다
창경궁에서도 많은 사건들이 벌어졌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장희빈(張禧嬪)및 사도세자(思悼世子)와 관련된 일이다
희빈 장씨를 총애하던 숙종은 희빈이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민씨를 독살하려는 악행을 저질렀음을 알고 희빈과 그 일가를 숙청하였다.당시 희빈의 거처가 창경궁 취선당(就善堂)이었고 인현왕후는 경춘전에서 승하하였다.또한,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게 하였는데,그 비극의 현장도 바로 창경궁이었다
창경궁은 고종 연간까지는 본래의 모습을 유지했으며 『宮闕志(궁궐지)』에 의하면 모두 2379칸에 이르는 여러 전각들이 있었다.그러나,20세기 들어서면서 창경궁은 일제에 의해 크게 변형.왜곡되기 시작했다.순종이 즉위하여 경운궁(慶運宮)에 서 창덕궁으로 이어한 이후 선인문 안에 동물원이 마련되는가 하면 옛 권농장(勸農場)이던 내농포(內農圃)일대에 일본식으로 못을 파 물고기를 기르고 연(蓮)을 심어 춘당지(春塘池)를 크게 왜곡하는 등 궁궐 전체를 공원화시켰던 것이다.이는 순종의 관람을 위한 것이라는 명분이었으나,
조선 왕조의 궁궐을 훼손시킴으로써 그 존엄성을 파괴하려는 일제의 정략적 계책에 의한 만행이었다.현재의 춘당지는 1986년 창경궁 복원 공사를 하면서 연못을 준설하고 그 안에 둥근 섬을 조성하는 등 전통적 방식으로 고친 것이다.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에는 수많은 건물들이 훼멸되고 일본인들에 의해 장서각(藏書閣).수정(水亭)등의 일본식 건물들이 들어섰으며, 1911년 부터는 궁의 이름조차 창경원(昌慶苑)으로 바뀌었다
이후,조선 왕조의 3대 궁궐이던 창경궁은 일반 백성들의 위락 장소로 전락되면서 민족 긍지를 말살하려는 일제의 음모에 희생되었다.이러한 창경궁이 제 이름을 되찾고 그 복원 사업이 시작된 것은 1980년대 들어서이다.우선 궁내에 들어서 있던 수천 그루의 벚나무를 제거하면서 발굴 조사를 거쳐 명정전 주변의 행각,문정전 일곽,빈양문 일곽,옥천교 좌우의 남북행각 등 일부 건물들을 복원하였다
고려시대의 남경(南京)이궁(離宮)터이기도 했던 창경궁은 서쪽으로는 창덕궁과 접해 있고 남쪽으로는 종묘로 통하는 곳에 입지하였다.주변은 낮은 언덕들로 둘러싸였는데 경복궁.창덕궁이 남향인 것과는 달리 창경궁은 동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增補問獻備考(증보문헌비고)』 「附歷朝營繕條(부력조영선조)」에는 이를 '예부터 태후가 거처하는 곳은 반드시 대내의 동쪽이었기에 동묘라 하며,창경궁도 그래서 동향을 택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창경궁이 창건 당시 대비들을 위한 별궁으로 지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입지 여건상 동향이 자연스럽고 적합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그러나,편전인 문정전과 내전의 주요 건물인 통명전.환경전.양화당 등은 남향이다
창경궁은 크게 정전과 편전이 있는 외전(外殿)과 그 뒤 북서 방향으로 전개된 내전이 중심을 이룬다.정문과 외전 사이에는 북에서 남쪽 방향으로 어구(御溝)를 따라 명당수가 흐른다.외전의 중심인 정문과 정전은 거의 일직선상에 놓여 있고 주변 행각이 두 번의 네모꼴 모양으로 구성되어있어 경복궁과 유사한 구성을 이루고 있다.즉,동향 정문인 홍화문과 전문인 명정문의 좌우에는 행각이 있고,이 행각은 같은 지점에서 각각 직각 방향으로 꺾여 서쪽으로 뻗어감으로써 네모꼴의 중정(中庭)을 형성한다.홍화문을 들어서면 남북 방향을 가로질러 어구(御溝)를 따라 흐르는 명당수를 건너는 돌다리 옥천교가 놓여 있다.다리를 지나면 명정문이고,명정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정전인 명정전이 자리잡고 있다.그런데,홍화문고 명정문은 중심축을 기준으로 정동(正東)에서 약간 북쪽으로 기울어진 방향으로 앉았다.정전 앞에는 박석을 깐 넓은 마당이 네모나게 형성되었는데 그 가운데로 어로(御路)를 설치하였으며 그 좌우로는 품계석(品階石)을 배열하였다.명정전의 남쪽으로는 편전,즉 왕이 집무를 보던 문정전이 남향으로 앉아 있다.명정전 뒤쪽으로는 복도각이 빈양문(賓陽門)으로 연결되며,그 왼편에 숭문당(崇文堂)이 있다
빈양문 밖 오른쪽으로는 내전이 전개된다.내전은 대체로 일정한 규범을 따랐다기보다는 이용에 편리하도록 건물이 배치되었다.빈양문 서북쪽 방향으로 함인정이 있고,그 뒤로는 담장이 있었다.함인정 뒤쪽으로 환경전.경춘전 등의 침전이 자리 잡았으며, 그 서북쪽으로 깊숙이 통명전이 위치해 있다.통명전 서쪽에는 자그마한 연못을 가로지르는 돌다리를 놓는 등 궁중 조경을 꾸몄다.통명전의 동쪽에는 양화당과 영춘헌이 있다.이들 내전 건물들도 사방으로 행각과 월랑 등이 가로놓이고 사이사이 통용문이 나 있는 등 제각기 독립된 공간을 형성하고 있었다.창경궁과 창덕궁의 남쪽 경계 부분에는 인조 때 세자의 처소인 동궁이 마련되어 저승전.경극당(敬極堂).낙선당(樂善堂).숭경당(崇敬堂).시민당(時敏堂) 등의 많은 전각들이 있었으나 몇 차례의 화재와 중건을 거쳐 낙선재 일곽을 이루게 되었다.이 낙선재 일곽은 원래 창경궁에 속했으나,현재는 담장을 경계로 하여 창덕궁 영역으로 구분되어 있다.현재 창경궁에 남아 있는 건물들은 임진왜란 뒤 중건된 광해군 시절의 건축 양식을 간직한 건물과 순조 때 중건된 건물로 대별된다.광해군 때의 건물은 홍화문.명정문.명정전 등이다
창경궁에서는 경종.추존왕 장조.정조.순조.현종 등의 왕들이 태어났으며 중종.명종비 인순왕후(仁順王后).인조비 인렬왕후(仁烈王后).장조비 헌경왕후.정조.정조비 효의왕후 철종비 철인왕후(鐵仁王后) 등이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이덕수 지음 '新궁궐기행'중에서*
창경궁(昌慶宮)
사적 제123호
서울 종로구 와룡동 2-1
조선시대 궁궐로 태종이 거처하던 수강궁터에 지어진 건물이다.
성종 14년(1483)에 정희왕후, 소혜왕후, 안순왕후를 위해 창경궁을 지었다. 처음 지을 당시의 건물은 명정전·문정전의 정전과 수령전·환경전·경춘전·인양전·통명전들의 침전이 있었으며, 양화당·여휘당·사성각 들이 있었다. 조선시대의 궁궐중에서는 유일하게 동쪽을 향해 지어졌다.
처음에는 별로 사용되지 않다가 임진왜란 때에 경복궁·창덕궁과 함께 불에 탄 이후, 창덕궁과 같이 다시 지어져 조선왕조 역사의 중심 무대가 되었다. 숙종의 사랑을 받던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독살하려는 못된 행동을 저지르다가 처형을 당했는데, 당시 희빈은 주로 취선당에서 생활하였다. 또한 영조는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일을 저질렀는데, 세자가 갇힌 뒤주를 궁궐 안의 선인문 안뜰에 8일간이나 두었었다.
창경궁은 순종이 즉위한 후부터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09년 궁궐 안의 건물들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였으며, 궁의 이름을 창경원으로 낮추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84년 궁궐 복원사업이 시작되어 원래의 이름인 창경궁을 되찾게 되었고, 궐 안의 동물들을 서울대공원으로 옮기면서 벚나무 역시 없애버렸다.
장조·정조·순조·헌종을 비롯한 많은 왕들이 태어난 궁으로, 광해군 때 다시 지어진 정문·정전들이 보존되어 있으며, 옆에 있는 창덕궁과 함께 조선시대 궁궐의 역사를 살피는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유적이다.
*문화재청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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