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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 속리산 법주사(俗離山 法住寺).충북 보은 본문

☆~ 절집.절터/충 북

보은 속리산 법주사(俗離山 法住寺).충북 보은

푸른새벽* 2007. 1. 24. 00:00

 

 











 

 






 











 

 






 






 











 






 

 






 






 






 











 

 






 






 






 






 






 






 






 











 

 











 

 






 






 






 






 






 






 











 

 






 






 











 

 











 

 






 






 











 






 

 

보은 속리산 법주사(俗離山 法住寺)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209번지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의신조사가 처음 이룩했다.천축으로 구법여행을 갔다 돌아온 의신조사는 흰나귀에 불경을 싣고 절지을 터를 찾아다녔는데 지금의 법주사터에 이르자 나귀가 더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를 맴돌았다고 한다.의신조사가 주변을 살펴보니 절을 지을 만 했으므로 이곳에 절을 짓고 부처님의 법이 머문다는 뜻에서 사명(寺名)을 법주사(法住寺)라고 했다.그후 성덕왕 19년(729)에 절을 중수했고 혜공왕 12년(776)에 진표율사가 중창하고부터 대찰의 면모를 갖추었다.이것은 사적기 등에 적힌 초창기 법주사의 내력이다


김부식이 쓴 「속리사 점찰법회소」와 『동문선』에 실린 고려 문신 박효수의 시,조선 전기 지리지의 집대성인 『신증동국여지승람』, 또 조선 철종 2년(1851)의 기록 등에 '속리사'라는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고려 이후에는 속리사와 법주사라는 이름이 함께 쓰였던 듯하다 .그렇다면 사적기의 의신조사 창건설과 사명 유래 등은 오히려 후대에 덧붙여진 것일 수 있다.의신조사는 신라 고승이라고 전해질 뿐 생애나 신앙의 성격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영심이 주석한 이래 법주사는 여러 차례 중수를 거치며 많은 건물과 암자를 거느린 큰절로 성장했다.고려 태조 1년(918)에는 왕사인 증통국사가 중건했고 숙종(1095~1105)때는 문종(1046~1083)의 아들이며 대각국사 의천의 이복아우인 도생 승통이 법주사에 주석했다.도생대사는 금산사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이룩한 혜덕왕사의 수제자이다.인종(1123~1146)때는 왕이 이자겸 일파에게 죽은 사람들의 원혼을 달래고 병을 낫게 하기 위해 이 절에서 점찰법회를 열었다고 한다.이처럼 왕이 점찰법회를 열었다는 것은  법주사가 당시 법상종 절 가운데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말하며 또 이 절에서 신라시대 이래로 점찰법회가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원종(1259~1274)때는 자정국존이 이 절에서 유식학을 강의했다.지금 법주사 경내에는 고려 충혜왕 복위 3년(1342)에 세운 자정국존비가 있는데 지금까지 확인된 자료 가운데 가장 먼저 이 비문에 법주사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공민왕 11년(1362)에는 홍건적의 침입으로 임금이 경상북도 안동까지 피난했다가 환궁하던 중 법주사에 들렀다.이때 공민왕은 양산 통도사로 칙사를 보내 석가모니의 사리 한 알을 가지고 오게 하여 법주사에 모시게 했다.지금 금강문 서쪽의 사리각에 있는 팔각원당형 사리탑이 그 때 불사리를 봉안한 사리탑이라 한다


근래에 법주사에서 이루어진 가장 큰 불사는 1990년 청동미륵대불을 건립한 일이다.미륵대불은 기단까지 합친 전체 높이가 33m나 되고 기단 아래에는 지하석실 법당(용화전)을 두었다


법상종 사찰에서는 미륵불을 주존으로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다.본래 법주사에는 미륵장륙상을 봉안한 용화보전이 있었다.이 법당은 뒤쪽에 산호대라 불리는 바위가 있어 산호전.산호보전으로도 불렸으며 사적기에 따르면  정면 7칸 측면 5칸의 2층 건물로 대웅보전보다 더 크고 웅장한 법주사의 중심 법당이었다.진표율사가 금산사에서 미륵불을 조성하고 점찰법회를 열었듯이 그의 법을 받은 영심도 처음부터 미륵불을 조성했을 것이다.이 최초의 미륵장륙상은 정유재란 때 사리지고 이후 중창하면서 다시 금동미륵장륙삼존상을 지어 산호전에 봉안했다.그 미륵삼존상도 고종 9년(1872)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을 위해 당백전을 만들려고 헐어갔고 용화보전도 무너져 초석과 미륵삼존의 연화대석 3개만이 남았다.1964년 용화보전 자리에 시멘트로 만든 미륵불입상이 세워졌는데 1986년 이를 헐고 청동미륵대불과 지하의 용화전을 완성한 것이다


지금 있는 청동미륵대불은 옛 용화보전 자리에서 남쪽으로 10m쯤 옮겨져 세워졌다.또 그 불사과정에서 예전 용화보전과 팔상전을 잇는 축위에 한 줄로 늘어서 있던 석연지.석등.희견보살상도 이곳저곳에 흩여져 놓이게 되었다.이로 인해 법주사의 가람 구조에 큰 변화가 생겼다.고려시대에 완성된 예전의 법주사 가람배치에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하는 화엄 신앙축과 용화보전을 중심으로 하는 미륵 신앙축이 팔상전에서 직각으로 교차하고 있었다.그러나 이제 그 구성요소들이 마당 곳곳에 점점이 해체됨으로써  미륵신앙축은 사라져버렸다.법주사 경내에 들어섰을 때 얼핏 건물들이나 여러 유물이 맥락 없이 하나하나 따로 던져진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마당이 넓어서가 아니라 이런 전체적인 질서와 정연함이 흩어진 까닭이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