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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미륵리절터(彌勒里寺址).충북 충주 본문

☆~ 절집.절터/충 북

충주 미륵리절터(彌勒里寺址).충북 충주

푸른새벽* 2006. 12. 14. 23:59

 






 






 

 






 






 






 






 






 











 

 











 

 











 

 











 

 






 











 






 

 











 


충주 미륵리절터(彌勒里寺址)


미륵리절터는 1970년대 발굴조사 과정에서 출토된 기와에 '대원사'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서 '미륵대원'이라고도 부른다.미륵대원 서쪽으로는 수안보에 이르는 계립재가 동쪽으로는 경북 문경에 이르는 하늘재가 위치한다.다시 말해 미륵대원은 영남과 중부 지역을 잇는 두 개의 중요한 고개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두 고개는 새재(鳥嶺)가 개척되기 훨씬 전인 신라 때 개척되었다.또한 북쪽으로 펼쳐지는 송계계곡은 덕주산성으로 둘러 싸인 천혜의 요충지이다.월악산 송계계곡에는 사자빈신사터와 덕주사,덕주산성 등 많은 유적들이 산재해 있어 미륵대원은 그 입지부터 매우 중요한 교통로 상에 위치한 전략적 거점임을 알 수 있다.이러한 요충 사찰에는 순수한 사찰 시설 외에도 여관,역원,시장,병영 등이 설치되어
'원(院)'이라는 이름이 붙기도 한다.미륵대원터 동쪽 구릉에 장방형으로 축조된 두꺼운 돌담과 건물터가 발굴되었는데 이륵사에 부속된 '원'터였을 것이다.


현재의 유적들이 건립된 시기는 대략 10세기경으로 추정된다.신라 말기는 약화된 중앙 왕권이 지방의 각 지역에서 발호한 호족들의 세력권에 편입되던 시기였다.후삼국시대란 다름 아닌 혹족들이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했던 때이고 호족 연합국가로서 고려의 개국을 맞게 된다.이 시기의 문화는 경주를 중심으로 형성된 귀족 문화가 지방까지 전파될 힘을 잃게 되자.지역의 토착 문화가 다시 발전하는 양상을 띤다.평민 출신인 호족들은 세련되고 정체된 귀족 문화보다 거칠고 역동적인 지역 문화를 더욱 선호하였다.미륵대원의 창건주가 누구였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고려 초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호족세력이 발원하고 경영했을 가능성이 높다.


사원은 18세기까지 경영되다가 불에 타 없어진 것으로 보이고 현재는 돌로 축조된 석축과 기단,석등,석탑,돌거북,깨어진 당간지주, 그리고 민예풍이 물씬 나는 돌미륵부처만이 남아 있다.특이한 것은 미륵부처 좌우와 뒤 3면을 에워싸고 있는 석축이다.이 첫축 앞면에는 두 줄의 초석들이 노출되고 석축 윗면에도 기둥을 세웠던 흔적들이 있다.복원하여 고찰하면 석축이 개방된 앞면에는 2층,석축 위에는 1층의 목조건물이 세워져
그 속에 미륵부처를 모신 법당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3면에 장엄한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지붕을 얹었으니 반석굴사원이 된 것이다.석축은 구조벽에 마감벽이 덧씌워진 이중 구조이고 마감 벽면에는 수많은 감실을 만들고 그 속에 작은 불상 조각들을 가득 채웠으리라 짐작된다.토함산 석굴암에서 정점을 이룬 한반도 석굴운동의 전통이 반석굴이자 반목조건축인 미륵대원에 이르러 막바지에 다다른 것이다 .


사찰은 남북 직선으로 흐르는 개울을 경계로 동원과 서원으로 나뉘는데 주요 유구들은 모두 동원에 밀집되어 있어 이 지역이 중심곽임을 알 수 있다.서원의 입구에는 움푹한 바위 위에 공 모양의 바위가 얹혀져 있는데 민간에서는 '온달장군의 공기돌' 또는 '보주탑(寶珠塔)'이라고 부른다.
서원 지역에 노출된 몇 개의 건물터들은 이 보주탑을 중심으로 배열되어 있다.


동원 지역 입구에는 깨어진 당간지주가 쓰러져 있고 그 뒤로 돌거북과 석등,오층석탑, 그리고 미륵불과 법당터가 일직선으로 정연하게 배열되어 있다.대지는 몇 개의 낮은 단으로 나뉘어 있는데 각 단 위에는 중문과 행랑들을 세워 영역을 분리했던 것으로 보인다.동원의 서쪽으로는 개울이,동쪽으로는 한두 단 높게 쌓은 건물터들이 나란히 형성되어 있다.


절터 중앙에 흐르는 개울은 인공 축조된 일종의 운하 시설이다.석굴의 뒷산 역시 인공으로 쌓은 가산(假山)이다.뒤편을 돌아 가면 원래의 개울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 물흐름 따라 내려오면 개울 위에 석굴을 축조하고 석굴 서쪽으로 인공 운하를 만들어 물줄기를 돌렸음을 알 수 있다.
무리할 정도로 불리한 입지에 석굴을 조성한 까닭은 아마도 석굴 내부에 습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보인다.개울 물줄기는 돌렸지만 여전히 지하수는 흐를 것이기 때문에 지하수가 석굴 바닥면의 온도를 낮추어 벽면에 맺힐 이슬을  바닥에 맺게하는 이른바 '강제결로'를 통해 석굴 벽면을 보호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반석굴이라는 미륵대원의 희귀한 역사적 가치를 모르더라도 이 절터는 남아 있는 석물들의 원초적인 형상만으로도 신비로운 장소가 된다.
자연 암반을 다듬고 그 위에 축조한 오층석탑,4개의 기둥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집 모양의 석등,정교미나 세련미와는 거리가 먼 투박하고 해학적인 돌거북,특히 납작한 얼굴에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미륵부처까지 웃음을 머금게 하는 유구들이다.
*김봉렬 지음 '불교건축'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