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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紹修書院).경북 영주 본문

☆~ 풍경소리/경 북

소수서원(紹修書院).경북 영주

푸른새벽* 2007. 2. 19. 00:21

 

 

 

 

 

 

 

 

 

 

 

 

 

 

 

 

 

 

 

 

 

 

 

 

 

 

 

 

 

 

 

 

 

 

 

 

 

 

소수서원(紹修書院)


경북 영주군 순흥면 풍기 소백산 쪽인 동북 방향으로 접어들어 가노라면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유적들을 만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소백산 비로봉으로부터 흘러내리는,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시원해지는 맑은 죽계천가에 자리한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사립교육기관의 첫 발자취이다


소수서원은 주세붕(周世鵬.1495~1554)으로부터 시작되었다.풍기 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은 우리나라 성리학의 선구자 문성공 안향 선생이 젊어서 공부하던 이곳 백운동에 안향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묘(祠廟)를 세웠다.중종 37년(1542)의 일이다
그리고 이듬해에 중국에서 주자가 세운 백록동서원을 본떠 양반자제 교육기관인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웠다.그후 퇴계 이황이 풍기 군수로 부임하면서 명종 5년(1550)에 왕에게 진언을 올려 '紹修書院(소수서원)'이라는 현판을 하사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소수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 살아남은 47개소에 들었으며 사적 제 55호이다


조선시대의 사립대학이랄 수 있는 서원은 그렇게 탄생되었고 조선 중.후기에 걸쳐 많은 인재를 배출하면서 학문과 정치의 요람이 되었다.서원이 생기기 전의 교육기관으로는 중앙의 성균관과 4부학당,지방의 향교가 있었다.관립기관인 향교는 사립교육기관인 서원이 생기면서부터 사실상 교육의 기능을 서원에 내주고 문묘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역할이 줄어들었다.서원은 특히 경상도에 많이 세워졌는데,조선 중종대부터 철종대까지 세워진 서원 417개소가 경상도에 집중돼 있다.또 전국적으로 200여 곳인 사액서원 가운데 56개소가 경상도에 있다.경북 북부지방이 아직도 '鄒魯之鄕(추로지향)',곧 공자와 맹자의 고향이라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는 것은 이러한 내력 때문이며 이와 같은 학문의 맥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본래 서원은 교육을 하는 곳이지만 서원마다 받드는 분이 있어 제사도 중요하게 여긴다.때문에 서원의 공간은 크게 교육공간과 제사공간으로 나뉜다.소수서원은 사묘에서 출발하여 교육기관이 된 만큼 그 배치가 엄겨한 규칙에 의하기보다는 매우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특징이다


서원으로서의 파격을 가장 먼저 보여주는 것은 소수서원을 들어설 때 만나게 되는 당간지주 한 쌍이다.아니,서원 영역에 웬 당간지주일까? 소수서원 자리는 본래 숙수사(宿水寺)라는 절이 있던 곳이다.절의 흔적은 이 당간지주나 소수서원 사료전시관 마당에 모아놓은 석등.석탑의 부분으로 남아 있는데 1953년에는 손바닥만한 금동불 수십 구가 발견되기도 했다.땅 위의 통치원리가 유교로 바뀌게 되자 힘이 미약해진 불교문화는 그런 식으로 땅속에 파묻혔던 것이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먼저 강당인 명륜당과 마주하게 된다.강당은 유생들이 모여서 강의를 듣는 곳으로 넓은 마루를 중심으로 온돌방이 달려 있는 것이 보통이다 .'白雲洞(백운동)'이라는 현판이 달려 있는 이 강학당은 동향을 하고 있는데 규모가 정면 4칸 측면 3칸이며 팔작기와집이다.강당 안의 대청 북쪽면에는 명종의 친필인 '紹修書院(소수서원)'이란 현판이 걸려 있으니 바로 서원의 중심건물임을 말해준다


그 뒤에 있는 일신재(日新齋)와 직방재(直方齋)는 선비들의 기거공간인 동재와 서재이다.현판은 둘 있지만 집은 이어진 한 채이다.명륜당이 동서로 길게 앉아 있는 데 비해 이 집은 남북으로 앉아 있다.그 오른편 개울 쪽으로는 ㄱ자로 앉혀진 학구재(學求齋)와 지락재(至樂齋)가 있다.지락재는 개울을 마주한 담장에 연해 있으니, 많은 유생들이 이곳에서 자연의 기운을 만끽하며 호연지기를 기르고 학문 연마에 심취했으리라


서원의 또 한가지 중요한 역할을 제사를 드리는 기능이다.서원마다 어떤 선비를 모셨는가에 따라 그 서원의 품격과 세력이 달라질 수 있으므로 서원들마다 앞다투어 영향력 큰 선비를 모시려고 했다.소수서원은 처음으로 안향을 모시는 사묘로 출발하였는데,사당공간은 강당 왼편으로 담장 안에 있으며 이 서원 안에서는 유일하게 단청을 칠했다.이 사당에는 안향 선생말고도 뒤에 안보(安輔)와 안축(安軸)주세붕을 함께 모셔 배향하고 있다.사당 바로 뒤 나무판자벽으로 된 자그마한 집은 책을 보관하는 장서각(藏書閣)이고 그 뒷 건물은 전사청(典祀廳)으로 제사 때 음식을 준비하는 곳이다


최초의 서원이니만큼 간직한 문화재도 많고 연구할 거리도 많아 소수서원은 전속 연구원을 두어 연구를 하게 하고 있다
유물전시관에서는 강학 모습,제향 모습의 모형을 갖추어 옛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보물 제717호인 주세붕 영정도 있는데 전신상에 관복을 입은 모습이다


한바퀴 돌아보면 금세 알 수 있듯이 소수서원은 건물들이 놓인 방식이 자유롭다.강당에 견주어 사당공간은 왼쪽 뒤켠으로 치우쳐 있고 특히 사당의 자리가 매우 어정쩡하기까지 하니 최소한 사당을 뒤에 놓고 강학공간을 앞에 놓는 '전학후묘(前學後廟)'조차도 염두에 두지 않는 듯하다.도산서원의 엄격한 계층성도,병산서원의 단아한 짜임새도 없으며,어떤 위계질서가 주는 엄숙함의 카리스마를 기대했던 사람들에게는 자유롭다 못해 시시하다는 느낌마저 준다.그것은 아마 소수서원이 최초의 서원이어서 어떤 규칙이 정해지기 이전에 형편과 필요에 따라 환경과 어우르면서 건물들을 앉혀 나갔기 때문일 것이다


서원의 담장 밖으로 나와 당간지주 옆에 있는 경렴정(景濂亭)에 올라보는 맛도 좋다.건너편 개울을 보며 시원한 물소리에 젖다보면 문득 바위에 새겨진 '白雲洞(백운동)'이란 흰 글씨와 붉은 칠을 한 '敬(경)'자가 보인다.'白雲洞'이야 이곳의 명칭을 새긴 것이겠으나 '敬(경)'자는 웬 것일까?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敬以直內 義以方外(경이직내 의이방외)'를 '敬'이란 한 글자로 드러낸 것이다.곧 '경으로써 마음을 곧게하고 의로써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반듯하게 한다'는 뜻이니 그 글자를 보며 행동을 바로잡으라는 의미이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소수서원(紹修書院)


사적 제55호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151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임금이 이름을 지어 내린 사액서원이자 사학(私學)기관이다.


조선 중종 37년(1542)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을 제사하기 위해 사당을 세웠다가, 중종 38년(1543)에 유생들을 교육하면서 백운동서원이라 하였다. 명종 5년(1550)에는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에 의해 ‘소수서원’이라 사액을 받고 나라의 공인과 지원을 받게 되었다.

중종 39년(1544)에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제사지냈고, 인조 11년(1633)에는 주세붕을 더하여 제사지냈다.


서원의 건물은 비교적 자유롭게 배치되었는데, 일반적인 서원의 배치가 완성되기 이전인 초기의 서원이기 때문인 듯하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강당인 명륜당이 있고, 학생들이 머물며 공부하는 일신재와 직방재가 연속으로 있다. 서원의 일반 배치가 강당 좌우에 대칭으로 동·서재를 두는 것인데 비해, 소수서원은 현판의 이름으로서 구분하였다.


사당은 명륜당의 서북쪽에 따로 쌓은 담장 안에 있다. 서원이 있던 자리에는 원래 통일신라시대의 절인 숙수사가 있었는데, 그 유적으로 당간지주와 초석 등이 남아있다.


소수서원은 조선시대 후기에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지금도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