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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사자산 쌍봉사(獅子山雙峰寺).전남 화순 본문

☆~ 절집.절터/전 남

화순 사자산 쌍봉사(獅子山雙峰寺).전남 화순

푸른새벽* 2007. 3. 23. 23:26

 

 






 










 






 

 






 






 *위의 그림 주 장은 쌍봉사 대웅전이 화재로 소실되기 전의 모습이다.

(문화재청 자료)






 *펜화가 김영택님의 작품입니다.

(혹시라도 저작권에 대해 이의가 있으시면 곧 삭제하겠습니다.)






 











 

 











 

 






 






 











 






 

 






 











 

 











 






 

 







사자산 쌍봉사(獅子山雙峰寺)

 

전남 화순군 이양면 증리 741번지


쌍봉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이다.조선 시대에는 대흥사의 말사였다.절이 있는 곳은 화순군 이양면 중리,절 뒤의 산은 계당산(桂棠山)이다 .조선 시대의 기록이나 지도에는 중조산(中條山)이라고 되어 있는데 언제부터 계당산이라 부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는 신라 경문왕(861~876년 재위) 때 철감선사(澈鑒禪師)도윤(道允.798~868)이 이곳의 산수가 수려함을 보고 쌍봉사를 창건했다고 한다.그러나 동리산 태안사에 있는 혜철(惠徹)(785~861)의 부도비에는 혜철이 신무왕 원년(839)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후 무주(지금의 광주)관내의 쌍봉사에서 처음으로 하안거(夏安居)를 지냈다는 내용이 씌어 있다.이것으로 보아 쌍봉사는 적어도 839년 이전부터 있었고 다만 철감선사가 주석(駐錫)하던 기간에 사세가 크게 일어났으리라 짐작된다.


철감선사는 출가하기 전의 성이 박씨이고 도호가 쌍봉이다.한주(서울)사람이며 신분은 육두품 이하 향족 출신이었다.18세 되던 헌덕왕 7년(815)에 당시 화엄십찰 가운데 하나였던 김제 모악산 귀신사(歸信寺)로 출가하여 10년 동안 화엄학을 공부했다.28세 되던 헌덕왕 17년(825)에 사신의 배를 얻어 타고 당나라로 갔다.그곳에서 마조 도일(馬祖 道一)의 제자로서 혜능의 법증손(法曾孫,3대째 법제자)에 해당하는 지주(池州) 남천 보원(南泉 普願)으로부터 법을 받았다.철감선사는 스승인 남천선사가 열반한 뒤에도 13년 동안 더 당나라에 머물다가 문성왕 9년(847)에 신라로 돌아온다.


귀국한 후 금강산 장담사로 가서 머물던 철감선사는 대략 문성왕 17년(855) 무렵에 쌍봉사로 와서 10여 년간 종풍을 펼치다가 경문왕 8년(868) 입적했다.그가 쌍봉사에 머물던 기간에 쌍봉사는 사세가 번창했고 제자가 많이 나왔다.철감선사는 이 절에서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자산문의 기초를 마련하였고,그의 종풍을 이어받은 징효(澄曉)가 영월의 흥녕사(지금의 법흥사)에서 사자산문을 열었다.생전에 그의 덕망이 널리 퍼지자 경문왕이 그를 궁중으로 불러 만나 본 후 스승으로 삼았고, 그가 죽은 후에는 철감국사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후 고려 시대 소성(紹聖) 연간(1094~1097)에 혜소(慧昭)국사가 중창했다는 내용이 적힌 사적비가 절의 동쪽에 있다.『고려사』권 42 최충헌전에는 최씨 정권 제3대 집정인 최항이 송광사 2대 사주인 진각국사의 제자가 되어 쌍봉사에서 주석하면서 무뢰승도를 모아 문도로 삼고 세도를 부렸다는 기록도 있다.공민왕 때는 전라도 관찰사 김방(金倣)의 시주로 중창을 보았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절 아랫마을 쌍봉리 양씨 가문의 세력에 눌려 조광조와 양팽손 등을 모신 죽수서원의 예속 사찰로 전락하기도 했다.임진왜란 때 절이 불타 버린 후 인조 6년(1628)에 중건했고 현종 8년(1667)과 경종 4년(1724)에 중창했다.정조 10년(1786)에 이조판서 김종수가 사적비를 쓸 때까지만 해도 전각 등 건물이 모두 400여칸이었다고 한다.


지금 쌍봉사 대웅전,명부전,극락전과 새로 지은 요사채,그리고 국보 제57호인 철감선사 부도와 보물 제170호인 철감선사 부도비가 있다.


천왕문 앞에 서면 기둥 사이 네모칸 안에 대웅전의 모습이 들어온다.정면 1칸 측면 1칸에 3층 목탑 모양을 한 독특한 집이다.이 집은 1986년 말에 복원된 것이다.


원래 여기에 있던 건물은 법주사 팔상전과 함께 우리 나라 목탑의 원형을 가늠하게 하는 귀중한 목조건축물로서 보물 제163호로 지정되어 있었는데,1984년 4월 초에 불이 나서 모두 타 버렸다.1962년에 옛 대웅전을 해체.수리 할 당시 3층 중도리에서 숙종 16년(1690)에 두번째로 중건했고
경종 4년(1724)에 세번째로 중건했다는 내용이 기록된 상량문이 나왔었다.


불타기 전에는 3층의 지붕이 팔작지붕이었는데,1986년에 복원하면서 사모지붕으로 바꾸었고 그 위에 석반(石盤)을 얹고 상륜부를 보완했다.
1962년에 해체.수리할 때 본디 사모지붕이었던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옛 대웅전 지붕이 팔작지붕이었던 것은, 원래 탑이던 것을 대웅전이라는 전각으로 고쳐 쓰게 되면서 거기에 맞게 개조한 것이었으리라 한다.


대웅전 뒤의 극락전은 정면 3칸에 측면 3칸의 맞배지붕,배흘림 기둥 집이다.집에 비해 기둥이 너무 크고 또 기둥에 비해 천장 부재가 빈약해서,
원래 다른 형식의 건물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극락전 왼쪽 앞에는 지장전이 있다.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인데,안에는 지장삼존상과 시왕상,인왕상 들이 모셔져 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