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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지리산 화엄사(智異山 華嚴寺).전남 구례 본문

☆~ 절집.절터/전 남

구례 지리산 화엄사(智異山 華嚴寺).전남 구례

푸른새벽* 2007. 4. 5. 23:47

 

 











 






 

 






 






 











 






 

 











 

 











 






 

 











 






 






 

 






 






 











 






 

 






 











 

 






 






 






 











 

 






 











 

 






 






 











 






 

 






 











 

 






 






 











 






 

 






 

 지리산 화엄사(智異山 華嚴寺)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12번지


화엄사는 신라 진흥왕 5년(544)에 인도 승려 연기(緣起)가 세웠다.선덕여왕 11년(642)자장이 중창했다.장륙전(현재 각황전)과 화엄석경을 의상이 만들었다 등등 여러가지 창건설이 있었으나 1979년 발표된 『신라화엄경사경(新羅華嚴經寫經)』에 의해 8세기 중엽 통일신라 경덕왕 때 황룡사 소속의 화엄학 승려였던 연기(緣起)에 의해 창건된 절임이 명확하게 밝혀졌다.억불정책을 썼던 조선시대에도 성황을 이루었으며,임진왜란 이후에도 7년 만인 인조8년(1630) 벽암 각성(碧巖 覺性.1575~1669)에 이해 중수되어선종 대가람으로 인정을 받았고,숙종 28년(1702)장륙전이 중건되자 선교 양종 대가람의 지위를 얻었다.이후 부분적인 중수가 있기는 했지만 이렇다 할 대규모의 중수는 없었다.


화엄사 가람은 4개의 공간으로 영역화되어 있다.첫번째는 일주문.금강문.천왕문.보제루까지 이어지는 직선형 진입공간이다.건물들이 조금씩 비껴서 있는데, 일직선 가람형태에서 느낄 수 없는,절집으로 점점 깊숙이 빨려들어가는 느낌을 받는다.일주문은 화엄사 전체 규모로 볼 때 소박한 편이며,금강문과의 사이에 화엄사 중창주 벽암스님의 부도비가 서 있다.보제루는 승려와 신도들의 집회를 목적으로 지은 것으로 정면 7칸 측면 2칸의 단아한 맞배지붕집이다.천왕문 쪽에서 보면 2층 누각이나,건물을 돌아 대웅전 쪽에서 보면 단층집이다.보제루 앞의 당간지주는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측되고,당시에는 이곳에서부터 산문이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보제루를 돌아서면,큰 앞마당을 가운데 두고 정면에 대웅전,왼쪽에 각황전이 높은 석축 위에 장대하게 버티고 있다.대웅전과 각황전은 화엄사의 중심축을 이루는 두 영역이다.


앞마당에는 동서 오층석탑이 서 있는데,석축 위의 대웅전을 중심으로 대칭을 이루지 않고 한쪽으로 치우쳐 있어 대웅전과 짝을 이룬 일금당 쌍탑 구조가 아닌 일금당 일탑 구조,동오층석탑은 남향한 대웅전과 서타은 동향한 각황전가 각기 짝을 이룬 구조가 아닌가 짐작된다.


동오층석탑 쪽에서 각황전을 마주한 채 올려다보고 있는 적묵당 또한 맞배지붕의 단아함이 돋보이는 집이다.


화엄사에서 중심이 되는 법당은 대웅전이다.보물 제299호로 고건축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건물인데도,거대한 규모에 안정된 비례를 갖춘 뛰어난 각황전으로 인해 조금은 관심권 밖으로 밀려난 신세이다.


화엄사를 화엄의 근본도량답게 만드는 각황전은 그 뜻만이 아니라 규모로 볼 때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불전으로, 고졸하면서도 당당한 위용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두 건물을 받들고 있는 석축은 신라시대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바른층쌓기를 한 장대석 위에 장방형의 돌들을 역시 바른층쌓기로 하고 두꺼운 판석을 덮은 모습이 매우 아름다우며,안정감 있다.


각황전 앞에 서 있는 석등의 위풍 역시 각황전의 웅장함과 짝을 이루는 것으로,세계에서 가장 크다.석등과 나란히 서 있는 원통전 앞 사자탑도 흥미로운 석조물이나,쓰임새를 알 수 없다.노주(露柱)라고도 하고 감로탑이라고도 하는데,일반적인 의미로 전각 앞에 세운 탑인지 아니면 다른 용도로 세운 석조물인지 알 수 없다.


화엄사를 위풍당당하게 하는 또 하나의 영역은 각황전 뒤쪽 경내 서북쪽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효대(孝臺)이다.여기에 불국사의 다보탑과 함께 우리나라 이형석탑의 우수한 작품으로 쌍벽을 이루는 사사자삼층석탑(四獅子三層石塔)이 있다.사사자삼층석탑 주변의 동백숲과 반송은 화엄사 경치 중에서도 손꼽히는 경치이다.


반송과 동백나무 외에 화엄사에서 주목받는 또 다른 나무는 천연기념물 제38호로 지정된 올벚나무이다.수령 3백 년쯤 되는 높이 15m의 나무로,80년 전까지만 해도 두 그루가 있었는데,절을 중수할 때 한 그루를 베어서 목재로 썼다고 한다.그때 베어낸 나무로 만든 판자 한 장으로 적묵당 안무를 깔고도 남았다고 하니 대단히 큰 나무였을 것이다.병자호란 이후 조선 조정에서는 창과 칼의 자루 등 무기의 재료로 쓰이는 벚나무를 많이 심도록 권장한 바 있는데,당시 화엄사의 벽암스님도 절 근처에 많은 벚나무를 심었다고 한다.이 올럽나무도 그 무렵에 심은 것 가운데 살아남은 한 그루일 것이다.


화엄사에는 산내 암자인 구층암에는 10세기 무렵의 삼층석탑과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또 하나의 석탑이 있으며,고려 초기의 석등과 배례석도 남아 있다.매표소 입구와 매표소와 일주문 사이의 중간 산자락 언더에 부도밭이 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지리산화엄사일원(智異山華嚴寺一圓)


사적 및 명승 제7호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12외 


지리산은 백두산의 정기가 남으로 흘러 내려오다 다시 솟았다 하여 두류산이라고 불리는 민족의 영산이다. 산기슭에는 실상사, 연곡사, 화엄사를 비롯하여 많은 절과 유적이 있다. 또한 지리산 일원은 우리나라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화엄사는 지리산 반야봉과 노고단 자락의 남쪽 기슭 계곡에 위치하며 해발 250m 정도의 산간 구릉지에 자리잡고 있다. 주변의 아름답고 화려한 자연경관과 함께 화엄종의 맏형격인 큰 절로서 장엄한 품격을 갖추고 있다. 임진왜란(1592) 당시 완전히 불타버린 것을 1630년에 각성스님이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의 대부분을 다시 세웠다.


현재 화엄사에는 화엄사 각황전(국보 제67호),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국보 제12호), 화엄사 4사자 3층석탑(국보 제35호) 등의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는데, 지리산의 아름다운 경관과 잘 어우러져 뛰어난 사적 및 명승지로 자리잡고 있다.
지리산은 백두산의 정기가 남으로 흘러 내려오다 다시 솟았다하여 두류산이라고도 불리는 민족의 영산으로서 산기슭에는 실상사, 연곡사, 화엄사 등 많은 고찰과 문화유적이 산재해 있으며, 지리산 일원은 우리나라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화엄사는 지리산 반야봉과 노고단 자락의 남쪽 기슭 계곡에 위치하며, 해발250m 정도의 산간 구릉지에 입지하며, 주변의 수려한 자연환경과 함께 화엄종의 대본산답게 장엄한 품격을 갖추고 있다. 화엄사는 백제(百濟) 성왕 22년(544)에 부처님의 나라 인도에서 오신 연기스님에 의해 창건된 천년의 고찰이며, 그후 의상대사가 화엄사에 주석하면서, 문무왕 10년(670)에 3층의 장육전을 건립하고, 사방벽면을 화엄석경으로 둘렀는데, 이로써 화엄사는 대도량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나말 여초에 화엄사에 주석하였던 도선국사가 도참설에 의하여 대대적인 중창을 한 이후 개창이래 최대규모를 갖춘 선·교 양종 총림 대도량이 되었다.


지정문화재 현황으로는 총 14점 (국보4, 보물5, 천기1, 도지정4)인데, 국가지정문화재(10점)로는 국보 제12호 화엄사각황전앞석등, 국보 제35호 화엄사사사자삼층석탑, 국보 제67호 화엄사각황전, 국보 제301호 화엄사영산회괘불탱, 보물 제132호 화엄사동5층석탑, 화엄사서5층석탑(제133호), 화엄사대웅전(제299호), 화엄사원통전앞사자탑(제300호), 구례화엄사화전석경(8,980점외 일괄 : 제1040호), 천연기념물 제38호 화엄사의 올벚나무가 있고, 시·도 지정문화재(4점)로는 도유형문화재 제49호 화엄사보제루, 화엄사9층암석등(제132호), 문화재자료 제34호 화엄사, 남악사(제36호)가 있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