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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헌수 장군 승전비(梁憲洙將軍 勝戰碑).인천광역시 강화군 본문

☆~ 풍경소리/인천광역시

양헌수 장군 승전비(梁憲洙將軍 勝戰碑).인천광역시 강화군

푸른새벽* 2007. 4. 4. 23:36

 

양헌수 장군 승전비(梁憲洙將軍 勝戰碑)


조선 말기의 무신인 양헌수(梁憲洙.1816~1888)는 이항로의 제자로 무예를 익혔다
헌종 14년(1848)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고, 철종 때 참상관이 되었다
그 후 제주 목사로 부임하여 전임 판관 백기호의 탐학을 징벌해 제주도민의 칭송을 받는 등
그가 부임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민심이 되살아났다


1866년 병인양요가 발발하자
정족산성의 수성장이 된 양헌수는 순무중군(巡撫中軍)이용희의 명령을 받아 별군관 등 367명을 이끌고 광성보의 손돌목을 지키게 된다
그런데 프랑스군이 물밀듯이 밀려들자 양헌수는 몰래 군대를 이끌고 정족산성에 매복한다
10월 3일 예상했던대로 프랑스 해군대령 올리비에는 부대원 160명을 이끌고 정족산성을 함락시키려 들어왔다가
매복해 있던 양헌수 군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조선군은 이 전투에서 많은 무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리고 마침내 프랑스군을 물리쳤다
구식무기조차 빈약한 조선군이 신식무기를 앞세운 프랑스군을 섬멸시킨 것이다


이 공로로 양헌수는 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고,이를 기념하기 위해 여기에 승전비를 세웠다
1869년 황해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한 양헌수는 그 후 어영대장.형조판서.금위대장에 올랐다가
1876년 강화도조약 때 개국 반대론을 끝까지 주장하는 강직성을 보여 준다
그는 곧은 신념과 청빈한 삶으로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일생을 바치고 간 드문 공직자였다
한 사람의 일생을 더듬어 볼 만한 그의 승전비가 삼랑성 동문 안 오른쪽에 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양헌수승전비(梁憲洙勝戰碑)


시도기념물 제36호(강화군)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산42 


병인양요(1866) 때 프랑스군을 물리쳐 승리를 한 양헌수(1816∼1888) 장군의 공적을 기리고 있는 비이다. 프랑스는 조선 고종 3년(1866) 10월 천주교 탄압을 구실 삼아 극동함대 소속 군함 7척으로 우리나라를 침입하였는데 당시 순무천총 양헌수 장군이 정족산성에 포수 500여 명을 매복 시켰다가 밤에 기습 공격하여 물리쳤다.


양헌수 장군은 헌종 4년(1838)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고, 병인양요 때 공을 세워 한성부 좌윤으로 특진되었으며 부총관·금위·어영 등을 거쳐 형조판서·금위대장·공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비는 긴 직사각형으로, 윗변을 둥글게 다듬었다. 고종 10년(1873)에 세운 것으로, 비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