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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 성주사지(聖住寺址).충남 보령 본문

☆~ 절집.절터/충 남

보령 성주사지(聖住寺址).충남 보령

푸른새벽* 2007. 11. 16. 00:00






























































































































































보령 성주사터(聖住寺址)

 

사적 제307호

충남 보령시 미산면 성주리


성주사는 백제 때의 오합사(烏合寺)가 통일신라 때에 개칭되면서 크게 중창된 것이다.숭암산 성주사 사적(崇巖山 聖住寺 事蹟)』에 따르면 오합사는 성주사의 전신인데  백제 법왕이 왕자 시절인 599년에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의 원혼을 위무하려는 뜻에서 세운 절이라고 한다 . 송과사이의 치열했던 정복 전쟁으로 솟구쳤던 백성의 원망을 달래 보려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따라서 오합사는 백제왕실에서 매우 중히 여긴 절이었을 듯하다 .그런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전하는 오합사는 백제 멸망과 관련된 불우한 이야기를 간직한 절이다  『삼국사기』에는 의자왕 15년 5월에 "흰말이 북악에 있는 오합사에 들어가서 불우(佛宇)를 돌며 울다가 며칠 만에 죽었다"는 기록이 있고『삼국유사』에도 의자왕 19년에 "오합사에 큰 붉은 말이 밤낮 여섯 시에 사원을 돌았다" 고 씌어 있다.이미 1960년대에도 간간히 나오는 백제 기와조각들 때문에 오합사로 추정되어 왔으며 본격적인 발굴에서는 백제 시대 기와 조각들이 더욱 많이 출토되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보령 성주사터(聖住寺址)


충남 보령의 성주사는 백제 법왕 때인 599년 경에 창건되어 오합사로 불리웠다고 전한다.그 후 신라 문성왕(文聖王.재위 839~857)대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무염(無染.801~888)국사가 이곳으로 오면서 성주사라 불리게 되었다.성주사는 신라 말,고려 초 구산선문(九山禪門) 중의 하나로 크게 번창하였는데발굴 결과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복구되지 못하고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구산선문은 지방 호족세력의 후원을 받아 대규모 가람으로 확장되었는데 중요한 교통로 상에 위치하여 전략적 거점으로도 이용되었다.보령 지역은 해안이 가까우면서도 산악이 발달하였는데,만수산(萬壽山)과 숭암산(崇巖山) 사이 골짜기를 타고 해안으로 빠지는 교통로가 개척된 곳에 성주사가 위치하고 있다.이 지역은 내륙에서 중국과 일본으로 통하는 창구이면서도,높은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어 대사찰이 독립된 구역을 이루기에 적합하다.


현재 사역(寺域)에는 중심곽 일대가 발굴되어 대략의 배치 형상을 알 수 있다.사역의 규모는 동서 220m,남북 142m로 추정되며,중문 안에 오층석탑이 있다.탑 뒤쪽으로 금당터,그 뒤에 삼층석탑 3기가 나란히 서 있고, 다시 그 뒤로 강당터가 있다.금당 동쪽으로는 거대한 삼천불터가 있으며,사방으로 회랑을 둘렀던 것으로 보인다.


발굴조사 결과,가람은 다섯 차례에 걸쳐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1차 가람은 오합사가 창건되었던 당시의 가람으로,중앙에 목탑이 있고 그 뒤로 금당이 위치하는 백제의 1탑 1금당 형식이었을 것이다.2차 가람은 오합사가 중창되던 시기의 가람으로 전돌과 돌을 혼합하여 구축한 기단이 발견되었고 이미 회랑이 존재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3차 가람은 성주사로 재창건되던 시기의 가람이다.판석으로 기단이 구축되고,목탑 대신 오층석탑이 세워졌으며,회랑도 더 넓게 건립되었는데 이 때의 성주사가 가장 전형적인 모습이었을 것이다.금당은 정면 5큰,측면 3칸의 크기였고,강당은 정면 7칸,측면 4칸으로,가운데 부분의 폭이 더 넓은 亞자형 건물로 추정된다.


4차 가람은 금당 동쪽의 회랑을 폐기하고 그 자리에 정면 9칸,측면 4칸의 삼천불전을 서쪽으로 향하여 세웠던 시기의 가람이다.삼천불전은 41.6 X 18.1m 의 대규모 건물로,중앙에 불단(佛壇)을 두고 그 주위로 소형불상 3000기를 안치할 수 있는 단을 두었다.대략 16세기로 추정되는 5차 가람은 삼천불전을 더욱 확장하고 나머지 회랑의 일부를 승방 건물로 바꾸어 비정형식 가람으로 변화하였다.


성주사의 가람배치 가운데 가장 특이한 점은 오층석탑 1기와 삼층석탑 3기가 앞뒤로 나란히 배열된 유일한 사례라는 것이다.조사 결과,이들 석탑은 동시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시대적 차이를 두고 건립된 것으로 밝혀졌다.중앙의 오층석탑은 성주사 창건기인 신라 후기에,뒤편 동.서 삼층석탑은 고려시대의 양식으로 추정된다.동.서 삼층석탑 사이에 위치한 중앙 삼층석탑은 다른 두 탑보다 약간 더 큰데,14세기 이후에 다른 곳에서 옮겨진 것으로 판명되었다.


정리하면 1탑 1금당식 가람으로 창건되었지만 몇 백년 후 금당 뒤에 동서 쌍탑을 세웠고,다시 몇 백년 후에 중앙탑을 더 세워 1탑ㅡ3탑식 가람이 되었다.그렇게 만들어진 건축적.교리적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한반도 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특이한 가람이다..주사 가람배치의 비밀을 언젠가는 밝혀야 할 것이다
*김봉렬 지음 '불교건축'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