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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보경사 원진국사비(寶鏡寺圓眞國師碑).경북 포항 본문

☆~ 풍경소리/경 북

포항 보경사 원진국사비(寶鏡寺圓眞國師碑).경북 포항

푸른새벽* 2008. 4. 16. 13:38

 

 

 

 

 

 

 

 

 

 

 

 

 

 

 

 

 

 

 

 

 

 

 

보경사 원진국사비(寶鏡寺圓眞國師碑)


고려 중기의 승려 원진국사(1172~1221)의 부도비이다.귀부와 비신의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귀부는 목을 앞으로 뽑아 크게 벌린 입에 여의주를 물고 큰 눈을 치떠 한껏 위세를 부리지만 당당하고 힘차 보이지는 않으며 그저 국사의 부도비에 걸맞은 솜씨를 빠듯이 유지하는 정도다.거북껍질의 낱낱 무늬 속에는 빠짐없이 '王'자를 새겨 국사에 대한 예우에는 모자람이 없으나 등껍질은 온몸을 넉넉히 가려주지 못해 옆구리가 드러난 옹색한 편이다.가늘고 긴 연잎을 사방으로 돌린 비좌 또한 그러대로 체면치레를 하는 수준이다


청석을 깎아 만든 비는 이수가 없는 형식으로 비신 윗부분 양 끝을 귀접이한 규수형(圭首形)이다.비머리에는 '圓眞國師碑銘'이라고 가로로 쓴 해서체의 제액을 음각했고,비신의 둘레로는 섬세한 당초무늬가 띠처럼 돌려져 있다.비신의 둘레를 당초무늬로 장식하는 기법이나 그 윗부분을 귀접이하는 형식 등은 고려 중기 이후부터 나타나는 양식의 하나이다.비문은 당대의 문신 이공로(李公老)가 짓고 글씨는 충렬왕 때 원나라 군대와 함께 일본 정벌에 나섰던무장 김방경(金方慶)의 아버지로 글씨에 능했던 김효인(金孝印)이 썼다.원진국사 입적 3년 뒤인 1224년에 세워졌다.비신 높이183cm,너비 104cm,두께 17cm의 규모로 보물 제252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진국사는
상주 사람으로 성은 신(申),자는 영회(永廻),법명은 승형(承逈)이다.유학을 가업으로 하는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세 살 때 고아가 되어 숙부 밑에서 자랐다.13세 때 문경의 봉암사로 출가하여 불문에 들었고 이듬해 김제 금산사에서 구족계를 받으면서 본격적인 수행의 길로 들어섰다.1197년 광명사(廣明寺) 선불장(選佛場)에서 베풀어진 선과(禪科)에서 상상품上上品)으로 합격하였다.그뒤 조계산 수선사로 보조스님을  찾아 그 문하에서 수학하여 법을 이었으며 이자현(李資玄)이 벼슬을 버리고 은거 수행했던 청평산 문수원(지금의 춘천 청평사)을 찾아 그가 「문수원기(文殊院期)」에서 주장한 "『능엄경(楞嚴經)』은 마음의 본바탕을 밝히는 지름길"이라는 견해에 공감하여 이후 『능엄경』을 수행의 지침으로 삼았다.우리나라 선종에서 『능엄경』을 숭상하게 된 연유는 여기서 비롯된다.1215년 대선사의 지위에 오른 뒤 왕명에 의하여 보경사의 주지로 부임하여 만년을 보냈다.1221년 7월 팔공산 염불사(현재의 동화사 염불암)로 옮겨 머물다 8월에 이곳에서 입적했다.문도들이 다비를 마친 뒤 유골을 수습하여 보경사에 탑을 세웠다.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고종은 국사로 추증하고 원진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보경사원진국사비(寶鏡寺圓眞國師碑)


보물 제252호
경북 포항시 북구 송라면 중산리 622 보경사 


보경사에 있는 고려 중기의 승려 원진국사의 탑비이다.

원진국사(1171∼1221)는 13세에 승려가 되어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수도를 하기도 하였고, 왕의 부름으로 보경사의 주지가 되었다. 51세로 입적하자 고종은 그를 국사(國師)로 예우하고, 시호를 ‘원진’이라 내리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간결한 모습으로, 비몸 윗부분의 양 끝을 접듯이 잘라 놓았는데, 이러한 모습은 당시에 유행하던 양식이다.

 

넓다란 바닥돌과 하나의 돌로 이루어진 거북받침돌은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머리를 하고 있다. 등에는 6각형의 무늬마다 ‘왕(王)’자를 질서정연하게 새겨놓았으며, 등 중앙에는 연꽃을 둘러 새긴 네모난 받침대를 조각하여 비몸을 끼워두게 하였다. 비몸의 둘레에는 덩굴무늬가 장식되어 있는데 이 역시 고려 중기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비문에는 원진국사의 생애와 행적이 기록되어 있으며, 글은 당시의 문신이었던 이공로가 지었고, 김효인이 글씨를 썼다. 비문에 의하면, 비가 완성된 것은 고종 11년(1224)으로 원진이 입적한 지 3년 후의 일이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