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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간지주의 분포와 특징에 대하여 본문
당간지주의 분포와 특징
당간과 당간지주는 중국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를 중심으로 건립되기 시작한 조형물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불전(佛殿)에 번이나 당을 장엄하는 전통은 있었지만 정형화된 당간과 당간지주가 본격적으로 건립되기 시작한 것은 통일신라 초기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통일신라시대 당간지주는 경주를 중심으로 하여 전국적으로 분포하고 있다.특히 경주 지역을 중심으로 다양한 양식의 당간지주가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데 이러한 것은 당시 불교가 신라 수도를 중심으로 성행하였으며 사찰의 조영과 경영이 경주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게 한다.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신라의 경주에는 일찍이 불교가 불꽃같이 퍼져 '절들이 별처럼 퍼져 있고,탑이 기러기처럼 늘어서 있다'고 기록하였다.당시 경주에는 기록이나 현재에 남아 있는 절터만 해도 수십 개 이상이 확인되듯이 도성 안팎에는 수많은 사찰들이 세워졌다.사찰이 도시 경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높게 설치된 탑과 함께 당과 당간이 중요한 경관 요소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고려시대에도 국초부터 수도인 개경을 중심으로 건립된다.이것은 불교의 중심지가 경주에서 개경으로 이동하였음을 방증해 준다.그리고 고려시대에는 당간과 당간지주가 개경을 중심으로 하여 경기와 충청권에 많이 건립되는 양상을 보인다.이것은 사찰의 창건과 같은 불사(佛事)가 이 지역을 중심으로 성행하였음을 간접적으로 알려준다
그리고 통일신라시대에는 경주를 중심으로 다양한 양식의 당간지주가 건립되면서 지방으로 확산되는 양상을 보인다.즉,당간과 당간지주의 건립이 수도였던 경주에서 시원하여 전국 각지로 전파되었다.사찰들은 도시에서 일정한 공간을 차지하며,많은 불도들이 드나드는 당시로서는 활성화된 공간이었다.이러한 사찰들의 입구에는 당간과 당간지주가 건립되어 있었다.현재 경주 일대에서 사찰명을 알 수 있는 대부분의 사찰에 당간이 건립되어 있었음이 당간지주로 확인되고 있다.경주에 소재하였던 사찰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에 기록된 황룡사,망덕사,사천왕사,보문사,불국사,삼랑사,남간사 등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찰에 당간과 당간지주가 건립되어 있었다.이외에도 경주 일대에는 사찰명은 알 수 없지만 다량의 당간지주가 확인되고 있어 7세기 중후반경에서 8세기까지 크게 성행한 조형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당간지주의 양식은 몇 가지 계열이 주류를 형성하면서 건립되었는데 경주 일대를 중심으로 집중 분포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이것은 경주 일대에 소재한 사찰들이 당간과 당간지주를 건립하려는 발원(發願)이나 불사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이러한 양상은 곧바로 지방에 소재한 사원으로도 급속히 확산되었다.이에 따라 통일신라시대 새로 창건되는 사찰을 비롯하여 기존에 있었던 사찰 중에서 비교적 규모가 큰 사찰을 중심으로 당간과 당간지주를 세우게 된다.화엄종을 중심으로 하는 교종 계열의 사찰에서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교종계열 사찰 중 각 지방에서 불교 신앙의 중심에 있었던 사찰들은 당간이 건립되었음을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당간지주로 알 수 있다.지방에 소재한 대표적인 사찰 중에서 부석사,화엄사,해인사,단속사,동화사,숙수사,미륵사,갑사,법수사,중초사,금산사 등
이외에도 사찰 명을 알 수 없는 수많은 사찰에서 당간과 당간지주를 건립하였다
한편 고려시대에는 통일신라시대의 당간지주로부터 영향을 받아 전국적으로 많은 양이 건립되는데 당간지주의 건립이 수도였던 개경에 집중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하지만 지방에 소재한 사찰들도 창건이나 중건 시 당간지주가 건립된다.즉,수도에서 지방으로 확산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건립되는 양상을 보인다.이것은 통일신라시대 사찰 가람의 영향으로 고려시대 들어와 전국 사찰에서 당간지주의 건립이 보편화되었음을 시사한다
고려시대에는 통일신라시대 당간지주처럼 정교하고 세련된 치석 수법보다는 단순하면서도 웅장한 당간지주가 많이 건립된다.통일신라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천왕사지.망덕사지.경주 구황동 당간지주 등은 간결하고 소박한 치석 수법을 보인다.즉,당간지주의 치석 수법이 당을 걸기 위한 당간을 견고하게 고정하려는 기능적인 측면에 치중되었다.그러다가 점차 기능뿐만 아니라 화려한 장식 수법이 가미된 당간지주가 건립되기 시작한다.이러한 양상은 당간지주를 치석이 발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이러한 당간지주로는 8세기 중후반경 경주 지역에 건립된 삼랑사지.불국사.경주 동천동 당간지주 등이 대표적이다.이후 지방에 소재한 사찰들도 경주 지역에 건립된 화려한 당간지주의 영향을 받아 9세기 말경까지 양식적으로 친연성을 보이는 당간지주가 전국 각지에 건립된다.예를 들어 단속사지.부석사.비로사.고령 지산동 당간지주 등이다
이러한 양상은 당시 장식적 경향을 보이는 석조미술의 양식적 흐름과 일맥상통하고 있다.이것은 당간과 당간지주가 가람의 필수적인 조형물로 발전되면서 장식적인 경향과 상징성이 강화되어 갔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따라서 당간지주도 불교문화의 발전과 맥을 같이 하고 있으며 불교문화가 중앙에서 지방으로 전파되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통일신라시대에는 불사가 왕이나 왕실의 발원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당간과 당간지주의 건립도 이들과 연관된 경우가 많다.이에 따라 경주 지역에 건립된 당간지주로부터 강하게 영향을 받은 당간지주들이 가까운 지방에 소재한 경우가 많다.즉,지방에 소재한 당간지주도 경주에 있는 당간지주와 치석과 장식 수법이 강한 친연성을 보이며 간공과 간구의 시공 수법도 동일한 양상을 보인다.이러한 당간지주로는 통일신라 말기까지 지방을 중심으로 꾸준하게 건립된 삼랑사지나 미륵사지 당간지주 계열을 들 수 있다. 물론 부분적으로 치석과 장식 수법이 차이를 보이기는 하지만 전체 양식은 일맥상통 하고 있다.이것은 중앙에서 파견된 장인들에 의하여 치석되거나 건립되었을 가능성을 높게 시사한다.또한 지방과 중앙이 일정한 연대 속에 불교문화의 발전이 이루어졌음을 알려준다.이러한 사실은 827년 중초사지 당간지주 건립 시 황룡사(皇龍寺)의 절주통 항창화상(節州統 恒昌和上)이 깊게 관련되어 있었다는 사실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또한 대안사(大安寺)에 살생을 금하는 당을 세울 것을 국왕이 허락하였다는 사실에서도 당간을 세워 당을 거는 것이 왕이나 왕실 등 중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그런데 고려시대에는 당간지주의 양식이 전체적으로 친연성을 보이기는 하지만 지방에 소재한 당간지주의 경우 다른 형식이 많다.또한 당간이나 당간지주를 치석하거나 당간을 고정하는 방법도 다른 경우가 많다.이것은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구체적인 양상을 알기는 어렵지만 당간과 당간지주가 그 지방 세력의 후원으로 건립된 경우가 많았고 이에 따라 중앙에서 파견된 장인이 아니라 지방에 소재한 장인에 의하여 건립되었을 가능성이 높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이러한 사실은 962년 건립된 용두사 철당간이 김예종(金芮宗)가 김희일(金希一) 등 청주 지역의 호족의 후원으로 건립되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그리고 고려시대에 접어들어 각 지방의 불사는 중앙정부의 지원도 있지만 해당 지역의 세력가나 지방민들의 참여와 후원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대표적으로 각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한 향도(香徒)가 참여하여 불사가 진행된 개심사지 오층석탑과 이천 장암리 태평흥국명 마애보살반가상 등이 있다.이에 따라 전대(前代)에 비하여 다양한 형식과 양식의 석조미술들이 조성되는데 당간지주도 이러한 변화가 반영되면서 지역별로 특징적인 양식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예를 들면 부안 서외리 석당간,무량사 당간지주,미륵리사지 당간지주,고창 흥덕 당간지주,만복사지 당간지주,원주 봉산동 당간지주 등이 당시 개경에 건립된 당간지주들과는 구별되는 양식을 보이고 있다.그러나 중앙 정부와 밀착되었던 사찰들은 당간지주의 양식이 개경에 건립된 당간지주들과 친연성을 보이고 있다.예를 들어 숭선사지 당간지주는 불일사지 당간지주,보원사지 당간지주는 영통사 당간지주,춘천 근화동 당간지주는 광법사 당간지주와 강한 친연성을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이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에 경주를 중심으로 다양한 양식이 건립되면서 각 지방으로 전파되었고,고려시대에는 개경이나 각 지방에서 치석 수법이 다른 당간지주가 건립되었다.그런데 형식이나 양식에서 친연성을 보이는 당간지주들은 다른 석조 조형물들과 마찬가지로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특히 지방에 소재한 당간지주들 중 건립시기가 비슷하고 가깝게 위치하고 있을 경우 그 양식이 강한 친연성을 보인다
통일신라시대 건립된 부석사.비로사.숙수사지 당간지주 등은 소백산 일대를 중심으로 분포된 당간지주로 치석과 장식 수법이 경주 지역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서로 강한 친연성을 보이고 있다.또한 송림사.죽장사지.동화사.부인사지 당간지주 등은 팔공산 일대를 중심으로 분포된 당간지주이다.이들 당간 지주들은 경주 지역에 건립된 당간지주들과 세부 수법에서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양식은 기본적으로 경주 지역에 건립된 망덕사지.사천왕사지.삼랑사지 당간지주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새로운 수법이 적용되어 혼합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그러데 이와 같이 동일한 양식의 당간지주가 일정한 지역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다는 것은 비슷한 시기에 동일 장인 집단에 의하여 건립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외에도 경주로부터 상당히 떨어져 있는 미륵사지.금산사.공주 반죽동.구룡사지 당간지주 등이 양식적으로 강한 친연성을 보인다.이것은 이들 당간지주가 경주 지역에 건립된 당간지주로부터 영향을 받아 건립되었지만 이 지역을 중심으로 성행한 당간지주로 동일 장인 집단에 의하여 건립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러한 양상은 고려시대 건립된 당간지주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먼저 남한강을 끼고 있는 사찰들에 건립된 숭선사지.법천사지.봉업사지 당간지주 등이 양식적으로 강한 친연성을 보인다.그리고 법주사와 괴산 외사리 당간지주가 친연성을 보이며 춘천 근화동과 홍천 희망리 당간지주가 비슷한 치석 수법을 보이고 있다.또한 용두사지.천흥사지.홍성 동문동 당간지주 등이 기단은 차이를 보이지만 지주부는 치석과 장식 수법에서 강한 친연성을 보인다.이와 같이 가까운 지역에 분포한 당간지주들은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이전에 건립된 당간지주를 모방하여 건립하였거나 동일 장인 집단이 이동하면서 건립하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이러한 사실로 보아 당간과 당간지주를 건립하는 기술은 다른 석조 미술품들과 마찬가지로 장인들에 의하여 그 기술이 전수되면서 발전하거나 새로운 형식이나 양식이 창출되기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당간과 당간지주의 건립과 성행,사찰에서의 유무 등을 당시 불교계의 변화와 연계하여 시론적으로 제시해보고자 한다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와 사찰에서 당간과 당간지주를 건립하는 것은 가람 상에서 한 요소로 자리 잡았다.적어도 8세기 중후반에서 9세기 전반기에는 당간과 당간지주가 사찰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조형물이었다.그런데 당간과 당간지주는 일반적으로 화엄종(華嚴宗)을 표방한 사찰들을 중심으로 처음에는 경주 지역을 중심하여 건립되다가 지방으로 확산되는 경향을 보인다.이후 통일신라 중기를 거치면서 말기까지 교종계열(敎宗系列)의 사찰들을 중심으로 대대적으로 성행하게 된다
당간과 당간지주가 건립되어 있는 사찰들을 교종과 선종으로 명확하게 구분할 수는 없지만 구산선문(九山禪門) 등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까지 선종을 표방한 사찰에서 당간지주가 드물게 건립된 것만은 사실이다.선종 사찰들은 일부를 제외하고 당간지주가 건립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또는 원래 건립되어 있는데,남아있지 않은 것으로도 보이지만 기록이나 실물이 남아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선종 사찰들은 원래부터 당간지주를 많이 세우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당간과 당간지주가 모든 사찰에 수용된 것은 아니며,특히 선종계열의 사찰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이것은 당시 불교계의 변화와 아울러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즉,불교계의 새로운 변화가 가람 상에 어느 정도 반영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선종은 8세기 중후반 경부터 서서히 유입되기 시작하여 9세기인 통일신라 말기 각 지방을 중심으로 크게 성행한다.특히 선종이 통일신라 말기 지방 호족들의 이념과 어울리면서 지방에 소재한 사찰에서 성행하기 시작하자 교종계열의 사찰들은 이전과는 달리 적지 않게 위축되었을 것이다.물론 교종 사찰들의 전면적인 위축은 아니었지만 이전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입지가 약화된 것은 사실이었을 것이다.선종은 점차 지방의 호족들과 연계되어 그들의 경제적 지원을 받으면서 소위 구산선문을 중심으로 세력을 넓혀갔고 상대적으로 교종은 위축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이에 따라 교종 계열의 사찰들이 불교계에서의 위상을 만회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당간과 당간지주를 대대적으로 건립한 것으로도 추정된다.그리고 선종이 성행하면서 상대적으로 교종이 위축되고 이전보다 악화되는 경향을 보이자 교종 사찰의 권위와 위엄을 높이고 상징성을 나타내기 위한 방편으로 당간과 당간지주를 기존의 사찰뿐만 아니라 새롭게 창건되는 사찰들에서 필수적으로 건립하는 조형물이 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그래서 신라말기와 고려 초기에 많은 양의 당간이 전국 교종계열의 사찰들을 중심으로 건립된 것이 아닌가 한다.어쩌면 당간과 당간지주의 대대적인 건립은 선종의 유입과 성행에 대한 반대급부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당간과 당간지주는 통일신라 중기부터 화엄종 계열의 사찰에서 대대적으로 성행한다.당시 화엄종 사찰을 대표하는 화엄십찰 중에서 현재까지 확인이 되지 않고 있는 2~3개의 사찰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당간지주를 건립하였다.또한 황룡사,불국사,법수사,장의사 등과 같이 대표적인 화엄종 계열의 많은 사찰에서 당간지주를 건립하였다.물론 시기가 흐르면서 선종계열의 사찰들도 당간과 당간지주를 세우기는 한다.그러나 각 산문을 대표하는 고승들이 머무르면서 선종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던 사찰들은 당간과 당간지주를 세우지 않았다.이와 같이 화엄종 계열의 사찰에서는 당간지주를 대대적으로 건립하였지만 선종 계열의 사찰에서는 세우지 않거나 꺼렸다는 점이 주목된다
구산선문 중에 하나였던 실상사(實相寺)에도 당간지주가 건립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실상사에 머문 증각대사 홍척(證覺大師 洪陟)과 수철화상(秀徹和尙)이 신라 왕실과 밀착 관계에 있었다.당간과 당간지주가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서면서 건립되기 시작하여 고려 전기까지 전국 대부분의 사찰에서 성행한 조형물이었고 실상사는 증각대사 홍척이 개창한 이래 통일신라시대부터 지리산 일대와 호남지역의 중심적인 사찰이었다.따라서 대부분의 사찰들이 당간지주를 세워 사찰의 위상을 높이려 했던 당대의 정황으로 보아 당연히 당간지주가 건립되어야 순리이다.그러나 실상사에는 당간지주가 남아있지 않으며,선종을 표방한 사찰이었기 때문에 당간과 당간지주가 건립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그리고 18세에 황해도 귀신사(鬼神寺)로 가서 화엄경의 교법을 듣기도 하였지만 교종에 비판적인 견해를 피력한 철감선사 도윤(澈鑒禪師 道允, 798-868)이 세운 쌍봉사와 무량수사(無量壽寺)에서 화엄을 읽고 외우다가 교종이 진실이 아님을 알고 중국 유학길에 올랐다가 돌아온 대경대사 여엄(大鏡大師 麗嚴, 862~930)이 머문 보리사(菩提寺)에도 당간지주는 건립되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따라서 당간을 세우는 것이 화엄종의 종파적 특성이고 교종 계열의 사찰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선종을 강력하게 표방한 승려나 사찰들은 당간을 세우기를 꺼렸거나 배제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사들이 교종에 대하여 부정하거나 비판적인 자세를 견지하지는 않았다.오히려 화엄사찰에서 구족계를 받고 화엄학을 수학하면서 화엄종에 대한 친밀감과 이해를 높였던 것은 사실이며,최근에 연구에 의하면 당시 교종과 선종이 대립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발전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그래서 선종 사찰에서도 점차 당간과 당간지주가 건립되는 양상을 보이거나 교종 사찰들의 가람 조영법을 수용하기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선종 사찰을 대표하는 구산선문 중에서 성주사(聖住寺)와 굴산사(堀山寺)등이 당간지주가 건립되어 현존하고 있다.성주사는 낭혜화상 무염이 머물면서 대대적인 중창과 아울러 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따라서 성주사는 경주 지역에 있는 사찰들과 많은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사료된다.이에 따라 선종사찰이었지만 경주 지역 사찰의 영향을 받아 당간지주가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그리고 굴산사는 대대적으로 중창되면서 사찰의 위상을 표상할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며 이미 당간지주가 교종 사찰을 중심으로 성행하여 그 사찰의 위상이나 경계를 나타내고 사찰의 위치를 표시해주는 표식적 기능 등을 하였다.이에 따라 대부분의 사찰이 당간지주를 건립하는 시대적 배경에 의하여 굴산사에도 당간지주가 건립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고려 전기에는 당간과 당간지주가 교종과 선종 등 종파를 초월하여 건립되는 조형물이 된다.이러한 배경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먼저 선종이 들어오기 전 신라의 불교는 교종 중심이었다.특히 초기의 선종 승려들은 대부분이 교종 사찰에 의탁하거나 출가를 하였다.그리고 선승들은 처음에는 화엄 승려들을 스승으로 받들며 수학하기도 하였다.구산선문을 개창한 선사들 대부분이 화엄종 사찰에서 출가하거나 강의를 들은 경우가 많았다.이에 따라 선승들도 화엄종에 대한 이해와 조예가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동리산문(桐裡山門)을 개창한 적인선사 혜철(寂忍禪師 惠哲,785~861)도 15세에 부석사(浮石寺)에 머물며 화엄경 강의를 듣고 구족계를 받았으며 사자산문(獅子山門)의 개조(開祖)라 할 수 있는 철감선사 도윤(澈鑒禪師 道允)도 처음에는 화엄학을 공부하였다.홍각선사 이관(弘覺禪師 利觀,?~880)도 대표적인 교종 사찰이었던 해인사에서 가서 수행을 하였다.실상산문의 수철화상도 구족계를 받은 뒤에 화엄학을 공부하였다고 한다.이것은 선종 출신의 승려지만 화엄학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인식 정도가 상당하였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희양산문(曦陽山門)을 개창한 지증대사 도헌(智證大師 道憲,824~882)은 부석사로 가서 불교를 배웠으며 화엄학에 조예가 깊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성주산문을 개창한 낭혜화상 무염(朗慧和尙 無染 ,812-888)도 중국으로 유학하여 화엄을 접하고 수학하였으며 선각국사 도선(先覺國師 道詵,827~898)도 지리산 화엄사에 들어가 화엄경을 수학하였다.사자산문의 실질적인 개창자라 할 수 있는 징효대사 절중(澄曉大師 折中,826~900)도 15세에 부석사로 들어가 화엄경을 수학하였다.낭공대사 행적(朗空大師 行寂, 832~917)은 해인사에서 수학하며 화엄경을 통달하였다고 하며 낭원대사 개청(朗圓大師 開淸,834~930)도 출가한 후 화엄경을 수학한 후 구족계를 받았다
이와 같이 당대 불교계의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던 대부분의 선사들이 처음에는 화엄학을 수학하였다.따라서 선사들도
화엄종에 대한 인식과 이해를 바탕으로 화엄종 계열의 사찰 가람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이것은 선사들도 교종 사찰의 주요 특징인 당간과 당간지주의 상징성과 그 배치법에 대한 인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9세기 전반기에 대표적인 화엄사찰이었던 해인사,부석사,화엄사 등도 선종이 들어와 교선일치의 성향에 입각하여 선종의 수행법을 일정부분 수용하는 자세를 보인다.한편 무량사와 부인사도 대표적인 화엄종 사찰이었다.그러나 이들 사찰들도 9세기 중반이후부터 선종의 수행법을 조금씩 수용하면서 선종으로 기울어가는 경향을 보인다.또한 화엄ㅈ오 사찰에서도 서서히 선사들을 포용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즉,대표적인 교종 사찰이었던 해인사의 창건주 순응(順應)이 우두선(牛頭禪)을 행하고 있어 교선일치적(敎禪一致的) 경향을 서서히 보이고 있다.또한 2대 주지였던 이정(利貞)도 당시 대표적인 화엄종 승려였는데 일찍이 해인사에서 여러 선승들과 교류하였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이 전형적인 선승(禪僧)이거나 선종 사찰이라 하더라도 화엄종을 수학하였거나 화엄학에 대한 높은 식견을 가진 선승들이 많았다.또한 대부분의 선승들이 출가하기 전에는 유교 경전을 읽었고 불문(佛門)에 들어와서는 화엄학을 익히고,다시 수행을 거듭하면서 선종으로 전향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그리고 구족계를 받은 이후 선승으로 전향하기까지 대부분 교종 사원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또한 선종 승려라 하더라도 교종에 대한 반감이나 대립보다는 원융이나 상호 보완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
따라서 선종 계열의 가람도 교종 계열의 사찰 가람 조영 방식으로부터 영향을 받거나 수용하였을 것이다.또한 처음에는 선종을 표방하고 창건되었으나 시대가 흐르면서 사찰의 책임을 맡은 주지가 화엄종 경향을 지닌 승려가 부임하면 교종 사찰의 가람 조영 방식을 수용하기도 하였을 것이다.그리고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가람 상에서 당간과 당간지주를 건립하는 것은 불상이나 석탑을 조성하는 것과 같이 일반화되어 갔을 것이다.따라서 교종 사찰뿐만 아니라 선종 사찰에서도 당간과 당간지주를 세우게 된 것을 추정된다.그러나 당간과 당간지주가 선종계 사찰보다는 교종계 사찰에서 많이 건립되었음은 주목되는 사실이라 할 수 있다
*엄기표 지음 '한국의 당간과 당간지주'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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