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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수문리 당간지주(江陵水門里 幢竿支柱).강원 강릉 본문

☆~당간지주/통일신라

강릉 수문리 당간지주(江陵水門里 幢竿支柱).강원 강릉

푸른새벽* 2008. 7. 9. 07:42

 

 





 









 





 





 





 

 





 





 









 

 









 

 

강릉 수문리 당간지주(江陵水門里 幢竿支柱)


당간지주는 강릉시 옥천동 주택가가 밀집된 지역의 작은 길옆에 위치하고 있다.현재 이 일대는 절터로 추정되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다만 강릉 대창리 당간지주가 멀지 않은 거리에 위치하고 있어,두 사찰이 이 지역에서 중심적인 사찰로 상당한 규모의 가람을 갖추었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두 지주는 원위치로 추정되는 곳에 남북으로 마주 서 있다.현재 기단이나 간대석 등은 결실된 상태이다.지주 하단부의 치석 수법으로 보아 정연한 기단은 마련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지주부는 아무런 조식이 없는 간결한 수법으로 치석하였다.각 면은 다듬은 수법이 고르지 못하여 정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여기저기 파손 흔적도 있다.특히 남쪽지주 뒷면 외곽 모서리 부분에는 깊게 패인 자국이 위아래로 9군데나 남아 있어 역사의 상흔을 느끼게 한다.이런 흔적이 남은 이유는 당간지주가 다른 용도로 이용하기 쉽기 때문에 용도를 전이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보인다.지주부 외면의 외곽 모서리는 일정한 너비(6~7cm)로 깎았으며 정상부는 내면에서 외면으로 나가면서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도록 하였다.당간지주는 평면 사각 석주형으로 상부로 올라가면서 좁아지기는 하지만 너비와 폭이 거의 동일하여 둔중한 인상을 준다.그런데 지주부 정상부를 자세히 관찰하면 두 지주의 치석 수법이 약간 다름을 알 수 있다.남쪽지주는 평평하다가 호선을 그리고 있어 둔중한 반면,북쪽지주는 유려하게 이어지고 있어 부드러운 인상을 준다.그리고 외면 외곽 모서리를 깎은 수법도 다르다.


이러한 치석 수법의 차이는 남쪽지주에 기록되 명문의 내용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명문은 자경(字徑)이 13인 해서체(楷書體)로 음각되어 있는데,내용은 '戰渡橋廢於之 去正德戊辰復設干府使南公惠寬之時 嘉慶丁丑八月 日'이다.이 기록에 의하면 당간지주는 1508년(중종3)경에 무너졌던 것을 복원한 일이 있고,강릉부사 남혜관(南惠寬)에 의하여 1817년(순조 17)에 다시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당간을 고정시키는 간은 지주 내면 꼭대기에 '凹'형의 간구(남:43x17cm/깊이 18cm,북:34x11cm/깊이 19cm)를 세로로 길게 마련하여 끼우도록 하였고,간공은 시공하지 않았다.그리고 간구 안쪽 가운데에는 간을 견고하게 고정시키는데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사각 모양의 작은 구멍을 양쪽으로 뚫어 놓았다.


이 당간지주는 정연한 양식을 보이고는 있지만 치석이 정교하지 못하고 간구의 시공 수법 등 여러 가지 점에서 강릉 대창리나 홍천 희망리 당간지주와 강한 친연성을 보이고 있다.따라서 건립 시기는 강릉 대창리 당간지주보다는 늦은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 사이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엄기표 지음 '한국의 당간과 당간지주'중에서*



강릉 수문리 당간지주(江陵水門里 幢竿支柱)

 

보물 제83호 
강원 강릉시 옥천동 43-9 


현재 마을 중심에 자리잡고 있으며, 일대가 절터로 추정되나 지금은 주거지로 변했기 때문에 절터의 존재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원래의 위치에 있던 그대로이며, 두 지주가 1m 간격을 두고 동 ·서로 마주 서 있다. 밑부분이 상당히 매몰되어 있어 깃대 받침이나 기단(基壇)이 있었는지 조차 확인할 수 없다. 깃대를 고정시켰던 흔적은 안쪽 윗부분에만 있는 직사각형의 구멍으로 알 수 있다. 두 지주의 최상단은 안쪽 꼭대기부터 바깥쪽으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내려온다. 동쪽 지주의 남쪽 면에는 조선 순조 17년(1817)에 복원되었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어 흥미롭다. 각 면이 거칠고 폭도 고르지 않으며 조각이 없어, 당간지주로서 발달되지 않은 형식이지만 전체적으로 소박하고 충실하다.
*문화재청 홈페이지*



강릉 수문리 당간지주(江陵水門里 幢竿支柱)


수문리 당간지주는 옥천초등학교 뒤 일반 주택가의 좁은 골목길에 1m의 간격을 두고 동서로 서 있다.지주는 한 변의 길이가 각각 75cm,80cm인 네모꼴이며 높이는 3.7m 이다.역시 아무런 장식이 없는 간소함을 보이고 있으며,지주 꼭대기가 사분원을 이룬다.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해 꼭대기에 간구를 마련하였고,당간을 받치는 간대나 기단부가 상당 부분 매몰돼 있다.


동쪽 지주의 남쪽 면에 '조선23대 순조 17년'(1817)이라는 해서체의 음각 명문이 남아 있다.글씨가 음각돼 있는 동쪽 지주의 바깥면에 돌을 따낸 흔적이 울퉁불퉁한 채 그대로 남아 있어 투박한 맛을 느낄 수 있다.


두 당간지주는 모두 간구나 지주 꼭대기의 자연스러운 곡선 처리로 보아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작품들로 추정되고 있으며 만들어진 당시의 위치에 원형대로 보존되고 있다고 한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