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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慶州 甘山寺 石造彌勒菩薩立像).국립중앙박물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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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慶州 甘山寺 石造彌勒菩薩立像).국립중앙박물관

푸른새벽* 2008. 11. 11. 07:30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慶州 甘山寺 石造彌勒菩薩立像)


715년에 제작된 보살상으로 전체 높이 2.57m, 불상 높이 1.83m이며 국보 제81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 경상북도 경주시 내동면 신계리감산사(甘山寺)에 봉안되어 있었던 것으로 함께 발견된 아미타여래입상과 함께 1915년서울로 옮겨져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광배의 뒷면에는 선각으로 새긴 긴 명문이 있는데, 비슷한 내용의 명문이 같이 발견된 아미타여래입상의 광배 뒷면에도 있다.


명문에 의하면 이 보살상의 조성한 사람은 김지성(金志誠)이다. 그는 통일신라시대 중아찬(重阿飡)의 집사시랑(執事侍郎)까지 지냈으며, 67세에 관직을 떠나서 719년(성덕왕 18)에 자기의 땅 감산장전(甘山莊田)을 바쳐 감산사를 짓고, 석조아미타불입상과 이 미륵보살상을 만들어 부모의 명복을 빌었다.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중엽까지는 고승들에 의하여 많은 경론 주석서들이 나온 시기로 경주감산사석조미륵보살입상의 명문에는 『유가사지론』과 관련이 있는 ‘무착(無著)’, ‘십칠지지법문(十七地之法門)’ 등이 언급되어 있어 이 보살상을 조성한 김지성이 법상종과 관련 깊은 유가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명문 중 일부는 『삼국유사』 권3 남월산조(南月山條)에도 전한다. 『삼국유사』에는 이 미륵상을 금당에 안치하였다고 하여 감산사의 주존이 미륵보살이었음을 알 수 있고, 아울러 우리나라 불교 법상종(法相宗)의 주불이 미륵보살이었음은 여러 기록에도 보인다.


이 보살상은 커다란 주형 광배(舟形光背)와 고부조(高浮彫)의 불신(佛身)이 하나의 돌로 조각되어 연꽃의 대좌 위에 얹혀 있다. 얼굴은 살이 찐 편으로 두 턱이 졌으며 눈은 부은 듯하고 큰 코와 꽉 다문 두꺼운 입에서 약간 이국적인 인상을 느낀다.


가슴에는 두 줄의 매우 화려한 목걸이가 있고, 팔뚝과 손목에 팔찌가 있으며, 영락(瓔珞)이 왼쪽 어깨에서 늘어져 오른쪽 무릎 뒤로 돌려져 있다.


천의(天衣)는 왼쪽 어깨에서 대각선으로 가슴을 가로질러 오른쪽 겨드랑이 뒤로 돌려져서 오른 팔뚝을 두 번 감고 아래로 늘어졌고, 왼쪽 부분은 시무외인(施無畏印)처럼 들려진 왼손의 팔뚝에 걸쳤다가 밑으로 구불거리며 늘어져 있다. 천의의 주름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려는 의도가 그 접힌 끝부분에서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치마형식의 하의(下衣)는 허리 부분에서 겹쳐져서 굵은 띠 장식으로 매어졌고, 접힌 자락은 여러 겹의 짧은 주름을 이루고 있다. 치마의 주름은 두 다리 사이로 모아져서 허리쪽으로 끌어올려졌으며, 그 늘어진 주름의 형태가 약간 도식적인 굴곡선으로 표현되어 있다.


대좌는 한 개의 돌로 조각되었으며, 맨 위에는 위를 향한 앙련(仰蓮)이 있고, 그 밑에는 복련(覆蓮)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맨 밑에는 팔각대석(八角臺石)을 받치고 각 면에 안상(眼象)을 음각하였다.


이 보살상은 복잡한 장식이 있는 높은 관을 썼는데, 그 윗부분에 작은 부처의 앉은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보살의 관에 이러한 화불(化佛)이 있는 경우는 대부분 관음보살을 나타내고 있는데 반하여 미륵보살로 명문화되어 있어 미륵보살의 도상으로서는 특의한 경우이다.


불상 전체로 보아 몸을 약간 오른쪽으로 비튼 삼곡(三曲) 자세이며, 어깨는 넓고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면서 둥글고 통통한 팔뚝으로 이어지고, 허리와 두 다리의 신체적 굴곡을 강조하듯 표현된 옷주름의 처리 등이 매우 육감적인 느낌을 준다. 또한 천의를 걸친 형식이나 목걸이, 허리띠, 치마를 입은 모습에서 삼국시대 보살상의 양식과는 다른 면을 보여 준다.


이러한 표현은 통일신라시대에 새로 도입되어 유행하였던 보살상 양식으로, 이와 유사한 양식을 보여 주는 예로는 경주 남산 칠불암(七佛庵) 삼존불의 양쪽 협시상(脇侍像)이나 경주 굴불사지(掘佛寺址) 사면석불의 서쪽 보살상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보살상들은 조성 연대가 약간씩 다르기는 하나, 근본적으로는 같은 계통의 원형에 의하여 조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한 새로운 불상 양식의 근본적인 원류는 인도의 굽타 시대의 빅토리아&알버트 박물관(Victoria&Albert Museum)소장의 산치 출토 석보살상 등과 연결되고, 점차 중국 당나라 불상 양식으로 진전되어 통일신라시대에 영향을 주게 된다. 중국당(唐)나라 장안(長安)의 보경사(寶慶寺)의 벽을 장식하였던 여러 종류의 삼존불상의 협시보살상들과 비교가 되는데, 특히 이 상들은 703년과 704년에 해당하는 명문들이 있어 양식 비교연구에 적절한 예라고 생각된다.

당시대의 보살상은 사선으로 설친 영락인 사괘(斜卦) 등의 표현은 보이지 않으나 벌거벗은 나형(裸形)의 상체에 왼쪽 어깨부터 오른쪽 겨드랑이를 사선으로 묶은 낙액(珞腋)을 두르고, 허리에서 한번 접어 착용한 요포(腰布), 화려한 목걸이를 착용한 보살상의 모습은 보경사(寶慶寺) 등과 같은 당(唐) 보살상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요포가 밀착되어 나타난 다리의 양감과 이상적인 사실주의적 모습은 8세기 동아시아 삼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국제적인 양식을 보여준다. 또한 다리 사이로 지그재그로 흘러내리는 옷주름은 당(唐) 신룡(神龍) 2년(706)에 조성된 보살입상 등에서도 확인되고 있어 동시대 당(唐) 보살상과의 유사성이 확인된다.


이 감산사보살상의 뒷면에 새겨진 명문은 신라사 혹은 금석학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으며, 이를 통하여 감산사보살상의 조성연대가 719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감산사보살상은 확실한 기년명 작품으로 통일신라시대의 불교조각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작품이다. 또한 당시의 당나라에서 유행하던 보살상 양식과의 공통점을 보여주고 있어, 8세기 신라 불상의 국제적 성격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자료*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慶州 甘山寺 石造彌勒菩薩立像)


국보 제81호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용산동6가, 국립중앙박물관)


경상북도 월성군에 있는 감산사는 신라 성덕왕 18년(719)에 김지성이 부모의 명복을 빌고, 국왕과 왕족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창건한 사찰이다. 창건한 해에 그는 어머니를 위해 미륵보살을, 아버지를 위해 아미타불을 만들었다고 한다. 현재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제81호)과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국보 제82호)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석조미륵보살입상은 머리에 화려하게 장식된 관(冠)을 쓰고 있으며, 얼굴은 볼이 통통하여 원만한 인상이다. 목에는 2줄의 화려한 목걸이가 새겨져 있고, 목에서 시작된 구슬 장식 하나가 다리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왼쪽 어깨에 걸치고 있는 옷은 오른쪽 겨드랑이를 지나 오른팔에 감긴 채 아래로 늘어져 있다. 허리 부근에서 굵은 띠장식으로 매어 있는 치마는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면서 발목까지 내려오고 있다.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光背)는 불꽃무늬가 새겨진 배(舟) 모양이며, 3줄의 도드라진 선으로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구분하였다. 불상이 서 있는 대좌(臺座)는 하나의 돌로 만들었는데, 맨 아래가 8각이고, 그 위에는 엎어 놓은 연꽃무늬와 활짝 핀 연꽃무늬를 간략하고 큼직하게 새기고 있다.

광배 뒷면에는 신라 성덕왕 18년(719)에 불상을 조각하였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는데, 이 글을 통해서 만들어진 시기와 유래를 알 수 있다. 돌로 만들었음에도 풍만한 신체를 사실적으로 능숙하게 표현하고 있어 통일신라시대부터 새로이 유행하는 국제적인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