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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국립중앙박물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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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국립중앙박물관

푸른새벽* 2008. 11. 12. 15:01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


국보 제3호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이 세운 순수척경비(巡狩拓境碑) 가운데 하나로,
한강유역을 영토로 편입한 뒤 왕이 이 지역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원래는 북한산 비봉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비(碑)를 보존하기 위하여 경복궁에 옮겨 놓았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비의 형태는 직사각형의 다듬어진 돌을 사용하였으며, 자연암반 위에 2단의 층을 만들고 세웠다.
윗부분이 일부 없어졌는데, 현재 남아 있는 비몸의 크기는 높이 1.54m, 너비 69㎝이며,
비에 쓰여져 있는 글은 모두 12행으로 행마다 32자가 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내용으로는 왕이 지방을 방문하는 목적과 비를 세우게 된 까닭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대부분이 진흥왕의 영토확장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의 건립연대는 비문에 새겨진 연호가 닳아 없어져 확실하지 않으나,
창녕비가 건립된 진흥왕 22년(561)과 황초령비가 세워진 진흥왕 29년(568) 사이에 세워졌거나
그 이후로 짐작하고 있다.


조선 순조 16년(1816)에 추사 김정희가 발견하고 판독하여 세상에 알려졌으며,
비에 새겨진 당시의 역사적 사실 등은 삼국시대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비(碑)는
신라(新羅) 진흥왕(眞興王) 16년(555)에 왕(王)의 국경순수기념비(國境巡狩記念碑)의 하나로
북한산(北漢山) 비봉(碑峰)에 세워졌던 것이며,
삼국시대(三國時代) 금석문(金石文) 중 가장 유명하고 귀중한 것이다.
1400여년의 오랜 풍우(風雨)로 그 비신의 보존이 어려워 이를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하여
1972년 8월 25일에 경복궁으로 이전하였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眞興王巡狩碑興太王及衆臣等巡狩管境之時記□分甲兵之□□□年□□□□覇主設□賞□所用高祀□□□□□□相戰之時新羅太王德不□兵故□□□□□强建文大득人民□□□□□□□□□□□□□□□□□□□□如有忠信精誠□□□□□□徙可加賞舜物以□□心引□□衆路過□城陟□□見道人□居石窟□□□□刻石誌辭□□尺干內夫智一尺干沙喙□□智近干南川軍主沙夫智及干未智大奈末□□□沙喙屈丁次奈天指□□幽則□□□□□劫初立所造非□巡守見□□□□□刊石□□□記我万代名


이 비문은 조선(朝鮮) 순조(純祖) 16년(1816, 병자(丙子))
우리나라 금석학(金石學)의 대가인 완당(阮堂) 김정희(金正喜) 선생이 친히 북한산 비봉에 올라 처음으로 판독하였다.


그리고 옆면에는 다음과 같은 문자가 새겨져 있어 그와 같은 사실을 전하여 주고 있다.
此新羅眞興大王巡狩之碑丙子七月金正喜金敬淵來讀. 丁丑六月八日金正喜趙寅永同來審定殘字六十八字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