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바람처럼 떠나다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忠州 靑龍寺址 普覺國師塔碑).충북 충주 본문

☆~ 풍경소리/충 북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忠州 靑龍寺址 普覺國師塔碑).충북 충주

푸른새벽* 2008. 12. 24. 06:32

 

 

 

 

 

 

 

 

 

청룡사터 보각국사부도비(普覺國師 浮屠碑)


조선 태조 3년(1394)에 왕이 보각국사를 기려 세우게 한 비이다
네모진 비좌 위에 머릿돌이 없는 비신이 서 있다
비좌에는 문양이 없고 윗면에 각진 굄이 두 단 있을 뿐이며
그 가운데 장방형 구멍이 파여 비신 아랫면을 꽂게 되어 있다
비신은 위쪽 양끝 모서리가 접힌 모양이다
비신은 높이 2.5m 너비 1.15m이며 전체 높이는 3.22m이다


비의 앞면에는 단정한 글씨체로 보각국사의 행장이,
뒷면에는 200여명에 이르는 그의 문도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앞면 아래쪽과 뒷면 위쪽이 파손되어 글자가 많이 마멸되었는데
비문의 내용을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보각국사는 고려 충숙왕 7년(1320)에 경기도 광주군 풍양현의 조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법명은 혼수이고 자는 무작(無作)이며 법호는 환암(幻庵)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대선사 계송에게 법을 받고 내외의 전적을 익혔으며
22세 때인 충혜왕 2년(1341)에 선선(禪選)의 상상과(上上科)에 올랐다
충목왕 4년(1348)에 금강산에 들어가 잠을 아끼며 정진하여 공부가 나날이 진보했다
공민왕 19년(1370)에 왕이 양주 회암사에서 나옹 스님을 초청하여 시험관으로 삼고
스님들의 공부를 점검하는 공부선(功夫選)을 베풀었다
혼수 선사는 최고의 성적으로 이 시험을 통과했다
그 후 왕이 요직에 임명하였으나 응하지 않았고 왕의 청으로 내불당에서 왕에게 법을 가르쳤다
우왕 9년(1383)에 국사가 되었으며 조선 태조 1년(1392) 73세의 나이에 청룡사에서 입적했다
그의 덕과 지혜는 나라의 추앙을 받을 만하므로
보각이라는 시호와 정혜원융(定慧圓融)이라는 부도명을 내리고 왕명으로 비를 세우게 하였다


비문을 지은 이는 권근이며 승려 천택이 글씨를 썼고 문인인 희진이 왕명을 받아 세웠다
비문의 글씨는 필력이 뛰어나고 빈틈이 없으며
달리 견줄 만한 예를 찾기 어려울 만큼 높은 서격을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보각국사 부도비는 보물 제658호이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忠州 靑龍寺址 普覺國師塔碑)

 

보물 제658호 
충북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산32 


청룡사 옛터에 남아 있는 비로,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활약한 승려인 보각국사를 기리기 위해 세웠다.


보각국사 혼수(1320∼1392)는 도를 지킴에 조심하고, 특히 계율을 따를 것을 강조하였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였다. 12세에 출가하여 22세 때에는 승과에 급제하였으며, 29세 때에는 금강산으로 들어갔다가 이후 청룡사로 옮겨가 머물렀다. 여러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수도하다가 조선 태조 1년(1392) 청룡사로 돌아와 73세에 입적하니, 태조는 시호를 내려 ‘보각국사’라 하고, 탑이름을 ‘정혜원융’이라 하였으며, 청룡사에 대사찰을 조성하도록 하였다.


비는 1장의 돌로 된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돌이 서 있는데, 위로 머릿돌을 따로 얹지 않고, 몸돌 양 귀퉁이를 접듯이 깎아 마무리해 놓았다.


조선 태조 3년(1394) 문인선사 희달(希達)이 왕의 명을 받아 세운 것으로, 권근이 비문을 짓고, 승려 천택이 글씨를 썼다. 글씨에서는 힘이 느껴지고, 예스러운 순박함과 신비스러움이 함께 어우러져 있어 중국의 어느 명품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품격을 지니고 있다. 이는 이후 조선시대를 통하여 이에 대적할 만한 것이 없을 만큼 돋보이는 면이라 할 수 있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