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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 희망리 당간지주(洪川 希望里 幢竿支柱).강원 홍천 본문

☆~당간지주/고려

홍천 희망리 당간지주(洪川 希望里 幢竿支柱).강원 홍천

푸른새벽* 2009. 1. 15. 00:20

 

 

 

 

 

 

 

 

 

 

 

 

 

 

 

 

 

 

 

 

 

 

 

 

 

 

 

 

 

 

 

 

 

 

 

 

 

 

 

 

 

 

 

 

 

  홍천 희망리 당간지주(洪川 希望里 幢竿支柱)


홍천 희망리 당간지주는 홍천읍을 끼고 흐르는 화양강변에 인접하여 있다.그리고 경작지와 민가 일대에 기와 조각들이 넓게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사찰의 규모가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당간지주 위치가 원위치라면 사찰 경내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강변에서 진입했던 것으로 보인다.고려시대 창건된 많은 사찰들이 강변과 인접한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아 홍천 희망리 당간지주의 소속 사찰도 원으로서의 기능도 아울러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아직까지 절 이름이나 구체적인 연혁은 밝혀진 것이 없으며 다만 석탑이 인근에 있었는데 현재는 읍사무소로 이건되어 있다.


두 지주는 별다른 장식이 없고 평면 사각 석주형을 세워놓은 듯 소박한 인상이다.간대석은 결실되었으며,지주 하단부의 치석 수법으로 보아 정연한 기단은 마련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고려시대에는 일부 당간지주를 제외하고 기단을 마련하지 않는 경향을 보인다.지주부는 각 면의 치석이 고르지 못하고 정자국이 여기저기 많이 남아있다.지주는 석주형으로 상부로 올라가면서 좁아지는 형태이고 정상부는 평평하다가 외면과 만나는 지점에서 호선(弧線)을 형성하고 있다.당간은 지주 내면 꼭대기에 사각형 간구를 시공하여 고정하도록 하였다.간구는 지주 규모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작게 시공하였다.


이와 같이 지주부는 전체적으로 투박하게 다듬었지만 외관은 안정된 인상을 주고 있다.그런데 지주부 각 면을 고르게 다듬지 않았으며,지주 외면 외곽 모서리를 깎지 않고 각지게 처리하였다.또한 지주 규모에 비하여 간구를 작게 마련한 점 등은 고려시대 당간지주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이러한 치석 수법은 강릉 대창리나 강릉 수문리 당간지주 등과 닮았으며 특히 법천사지와 춘천 근화동 당간지주와 강한 친연성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당간지주의 건립 시기와 관련하여 당간지주가 서 있는 일대에서 옮겨진 홍천 희망리 당간지주와 삼층석탑이 주목된다.당간지주와 삼층석탑은 같은 사찰의 석조미술품으로 확실시되고 있는데 그 양식으로 보아 거의 비슷한 시기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보인다.삼층석탑은 기단부와 탑신부가 통일신라시대의 석탑들과 비교하여 간략화의 경향이 보이지만 여전히 전형 양식을 계승하고 있다.따라서 석탑은 고려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당간지주도 이와 비슷한 시기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보인다.홍천 희망리 당간지주는 보물 제80호로 지정되어 있다.
*엄기표 지음 '한국의 당간과 당간지주'중에서*

 

 


홍천희망리당간지주(洪川希望里幢竿支柱)

 

보물 제80호 
강원 홍천군 홍천읍 희망리 376-20


희망리 당간지주는 홍천읍내의 큰길을 가로질러 홍천강둑을 따라 들어가면 쉽게 만날 수 있다.주변은 주택가이고 앞으로는 높은 제방이 가로막긴 했지만,바로 제방 너머 홍천강을 바라보게 되었던 게 당간지주의 본래 모습이 아니었나 여겨진다.이 근동 일대가 모두 여기 당간이 알리던 절터였다고 전하며 지금도 땅을 파면 기와 조각이 나온다고 하니 아마도 이 근방 유수의 대찰이었던 모양이다.또한 현재 당간의 위치나 주변으로 봐서 천변(川邊)사찰이며 평지가람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는 매우 드문 경우에 해당한다.다만 여기 절이 있던 당시에도 둑방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작지도 않은 큰 개천이 절과 너무 가깝게 있지 않았나 하는 우려를 지울 수 없다.만일 둑방이 없이 홍수를 만난다면 물은 여지없이 넘쳐 들어왔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당간지주는 약 70cm 거리에서 동서로 마주보고 서 있는데 마주보는 안팎에 아무런 조각이 없어 간결하고 수수하다.맨 윗부분에만 작은 호선(弧線)이 그려져 있고,당간을 고정시키는 간(杆)은 위쪽 한 곳에만 마련됐으며,양 지주의 안쪽 윗면에 정방형의 간구가 있는 등 고려 중기에 흔히 보이던 생략된 양식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기단과 간대가 본래 없지는 않았겠으나 석재조차 전혀 남아 있지 않아 알 방법이 없고 현재의 기단은 새로 단장해 마련한 듯 방형의 넓적한 공간에 자갈이 촘촘히 깔려 있다.그 안에 5m 키의 당간지주를 세웠는데,본래 상태가 아니어서 균형을 잃고 있으나 모르는 사람이 보면 마음 써 단장을 했구나 여길 만하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