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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복룡동당간지주(尙州 伏龍洞幢竿支柱).경북 상주 본문

☆~당간지주/통일신라

상주 복룡동당간지주(尙州 伏龍洞幢竿支柱).경북 상주

푸른새벽* 2009. 2. 1. 13:17

 

 





 









 

 





 





 





 





 









 

 





 









 





 

 





 

 상주 복룡동당간지주(尙州 伏龍洞幢竿支柱)

 

당간지주는 마을 사람들이 '돌방아샘'이라고 부르는 논 가운데 축대 위에 동서로 세워져 있다.현재 절터로서의 면모는 찾을 수 없지만 주변 경작지에서 기와와 청자편이 출토되고 있어 절터였음을 알 수 있다.


기단은 잡석들이 쌓여있어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며 간대석이 두 지주 사이에 마련되어 있다.두 지주의 상대 간격은 최초 건립 시 보다 많이 벌어져 있는 상태인데 간대석의 규모로 보아 원래는 69~70cm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간대석은 지주형으로 규모가 큰 긴 사각형의 돌을 남북으로 마련하였는데 크기가 334cm로 지주의 높이와 거의 같다.그런데 간대석이 북쪽 부분은 지주의 하단부와 같이 치석수법이 고르지 못하고 넓은 것으로 보아 땅속에 묻기 위한 치석으로 보이며 남쪽으로 갈수록 가늘어지고 있어 최초 치석 시에는 지주용이었으나 어떤 이유로 간대석으로 변용한 것으로도 보인다.간대석 상면 중앙에는 원공(지름 36cm, 깊이 12cm)을 시공하여 당간을 끼우도록 하였고 원좌의 흔적이 남아 있다.


지주부는 내면 하단부가 심하게 파손되었다.또한 절단되어 새롭게 보수한 흔적도 있다.지주는 평면 사각 석주형으로 상부로 올라가면서 좁아지는 형태이며 외면 외곽 모서리는 12~13cm 정도로 넓게 각을 깎았다.정상부는 내면에서 외면으로 나가면서 평평하다가 유려한 호선을 그리고 있다.당간을 고정시키는 간은 지주 내면 꼭대기에 사각형의 홈을 파서 간구를 마련하였으며 간공은 시공하지 않았다.


두 지주는 전체적으로 너비와 폭이 전체 높이에 비해 커서 둔중한 인상을 주고 있다.그런데 각 면을 고르게 다듬었으며,지주는 상부로 올라가면서 좁아지고 있다.또한 외면 외곽과 정상부의 수법에서 석공의 치석 기술이 상당하였음을 보여준다.이와 같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소박한 인상을 주고,각 면을 정교하게 치석한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에 주로 건립되었다.또한 지주 규모에 가깝게 길다란 간대석을 마련한 수법 등은 중초사지나 용두사지 당간지주 등과 상통하고 있다.이러한 것으로 보아 상주 복룡동 당간지주는 통일신라 말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엄기표 지음 '한국의 당간과 당간지주'중에서*

 


상주복용리당간지주(尙州伏龍里幢竿支柱)


시도유형문화재 제6호(상주시)  
경북 상주시 복용동 207-2 


복룡동 도로변의 논 한가운데에 남아 있는 이 당간지주는 높이 마련된 돌단 위에 서 있다. 전체적으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올수록 약간 굵어지고 있으며, 아랫부분은 두툼해져 투박해 보인다. 두 바깥면의 양 모서리를 부드럽게 다듬어 놓았을 뿐 각 면에는 조각을 두지 않았다. 기둥의 아랫부분에 살짝 금이 가 있고, 기둥사이에는 당간을 받치던 받침돌이 놓여 있는데, 그 윗면에 커다란 홈을 두어 당간을 꽂아 두도록 하였다. 꼭대기는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둥글게 깎아 다듬어 놓았고, 안쪽면에는 당간을 고정하기 위한 네모난 홈을 파놓았다.


돌을 다루는 수법과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인 것으로 추측되며, 가까운 거리에 있는 석불좌상이 이 당간지주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