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바람처럼 떠나다

산청 단속사터 당간지주(斷俗寺址 幢竿支柱).경남 산청 본문

☆~당간지주/통일신라

산청 단속사터 당간지주(斷俗寺址 幢竿支柱).경남 산청

푸른새벽* 2009. 2. 16. 08:33

 





 

 





 





 





 





 









 

 









 

 





 





 









 

 





 









 

 





 

 단속사터 당간지주(斷俗寺址 幢竿支柱)

 

경남 산청군 단성면 운리


단속사는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충(信忠)이 763년 벼슬을 버리고 승려가 되어 왕을 위하여 창건하였다는 내용과이준(李俊.純)이 748년에 조연소사(槽淵小寺)를 고쳐 큰 절을 만들고 단속사라 하였다는 두 가지 내용이 전하고 있다.『삼국사기』에는 이순(李純)이 경덕왕을 위하여 763년에 단속사를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이렇나 것으로 보아 단속사가 경덕왕대에 창건되었음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그리고 단속사는 신행선사(信行禪師.704~779)가 머물면서 크게 확장되며 왕을 비롯한 중앙정부와 긴밀한 관계가 된다.또한 최치원이 머물기도 하였으며,희강왕의 아버지로 시중을 역임하기도 한 김헌정(金憲貞)이 찬한 신행선사비가 세워지기도 했다.현재 사역에는 삼층석탑 2기를 비롯하여 사찰이 있었던 사실을 알려주는 유적이나 유물들이 남아 있다.


당간지주는 중심 사역으로 들어가는 진입 공간에 동서로 배치되어 있다.두 지주는 절단된 흔적이 여기 저기 남아 있지만 치석 수법은 동일하다.
기단이나 간대석은 확인할 수 없으며,다만 두 지주는 그 주변과 하단부의 치석 수법으로 보아 잡석을 놓아 단단하게 다졌음을 알 수 있다.두 지주는 간공 부위가 절단되어 다시 결구한 상태이다.지주부는 전후면 외곽에 윤곽대를 돌리고,외면 가운데에는 음각(陰刻)으로 1조(條)의 세로띠를 장식하였다.그리고 외면 외곽 모서리를 일정한 너비로 깎아 각을 없앴다.정상부는 부드러운 호선을 형성하도록 치석하였으며 그 가운데 1단의 굴곡을 두어 장식하였다.간공은 상중하 3곳에 시공하였는데,모두 관통되었으며 상하는 사각형으로 가운데에는 원형으로 뚫었다.


지주부는 전체적으로 각 면을 고르게 다듬었으며,세련된 인상을 주고 있다.또한 치석과 장식 수법 등이 우수하고 화려한 양상을 보인다.
지주부의 치석 수법은 삼랑사지나 불국사 당간지주와 같이  외곽에 윤곽대와 정상부에 1단 굴곡을 두어 장식을 하였고 간공은 경주에 건립된 사천왕사지나 경주 구황동 당간지주와 같이 여러 개를 관통하여 시공하였다.이것은 단속사지 당간지주가 이들보다 늦게 건립되면서 경주 지역에 건립된 지주부의 치석 수법을 채용한 결과로 보인다.특히 단속사는 경덕왕대에 창건되었으며,신행선사가 머물면서 경덕왕과 혜공왕 등 왕실로부터 적극적인 후원을 받았다.따라서 당간지주는 초창 이후 단속사가 가람의 면모를 갖추면서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삼층석탑과 비슷한 시기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  단속사지 당간지주는 8세기 중후반경에 경주 지역의 당간지주로부터 영향을 받아 건립되었으며  국가에 소속되었거나 경주 지역에 건립된 당간지주 양식에 대하여 잘 알았던 장인들이 건립하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엄기표 지음 '한국의 당간과 당간지주'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