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바람처럼 떠나다

안동 운흥동 당간지주(安東 雲興洞 幢竿支柱).경북 안동 본문

☆~당간지주/통일신라

안동 운흥동 당간지주(安東 雲興洞 幢竿支柱).경북 안동

푸른새벽* 2009. 6. 30. 17:09

 

 

 





 





 





 





 





 





 









 

 





 





 









 

 

안동 운흥동 당간지주(安東 雲興洞 幢竿支柱)

 

안동 운흥동당간지주는 안동역 서쪽 편 공원 내에 안동 동부동 오층전탑과 같이 서있는데 한국전쟁 당시 지주부의 상부가 심하게 파손되었다고 한다.당간지주와 전탑은 동일 사찰의 유물로 보이는데 아직까지 사명寺名은 알 수 없다.다만 안동 관련 각종 기록에 등장하는 법림사法林寺로 추정되고 있다.


기단은 남아 있지 않으며,두 지주 사이에 거칠게 다듬은 원형의 간대석을 마련하였다.간대석 양 측면은 'ㄷ'자형으로 홈을 마련하여 지주를 끼워 고정하도록 하였다.이러한 것으로 보아 간대석이 지대석 역할을 겸했던 것으로도 보인다.간대석 상면에는 원형의 원좌와 원공을 마련하였는데 비교적 규모가 큰 편이다.이러한 것으로 보아 하부의 지름이 상당히 큰 당간이 올려졌음을 알 수 있다.원좌 외곽으로는 일정한 너비로 낙수홈을 돌렸는데 낙수홈에 모인 물이 빠지도록 좁은 홈을 두 곳에 시공하는 치밀한 수법을 보이고 있다.


두 지주는 현재 남북으로 마주 서 있는데 원래의 상대방향인지는 알 수 없다.지주부는 상부가 파손된 것 외에는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두 지주는 간대석에 홈을 마련하여 약간씩 좁아지도록 하고 각 면을 고르게 다듬었다.지주의 외면 외곽 모서리를 좁게 깎았으며 상부는 꼭대기에서 1m정도 아래로 1단 낮게 치석하였다.이러한 수법은 통일신라시대 건립된 당간지주에서 자주 활용된 장식 기법이다.당간은 간공과 간구를 마련하여 고정하도록 하였다.간구는 내면 꼭대기에 세로로 길게 'U'자형으로 시공하였다.그리고 간공은 두 지주가 다르게 마련하였는데 남쪽지주는 113cm간격을 두고 관통되지 않은 2개의 간공을 시공하였으며 북쪽지주는 112cm 간격을 두고 관통된 2개의 간공을 시공하였다.따라서 간은 북쪽지주에서 끼웠음을 알 수 있다.이와 같이 관통된 원형의 간공을 시공하여 당간을 고정하는 기술은 통일신라시대에 많이 채용되었다.


지주는 평면 사각형으로 규모가 그리 높지도 않고 장식적인 치석 수법을 채용하지 않아 소박한 인상을 주고 있다.특히 안동 운흥동 당간지주는 간대석 외에는 827년 건립된 중초사지 당간지주와 양식적으로 강한 친연성을 보인다.그런데 두 당간지주는 세부적으로 각 면을 다듬은 치석 수법이나 전체적인 양식에 있어서 안동 운흥동 당간지주가 중초사지 당간지주보다는 약간 앞설 것으로 추정된다.또한 당간지주는 사찰에서의 위상이나 그 중요성으로 보아 옆에 있는 동부동 오층전탑과 비슷한 시기이거나 약간 늦은 시기에 세워졌을 것이다.이러한 점으로 보아 안동 운흥동 당간지주는 9세기 초반경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보인다.한편 『영가지永嘉誌』에 등장하는 남문 밖 철주가 현재 두 지주만 남아있는 안동 운흥동 당간지주의 당간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고 철당간이 세워졌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확신할 수는 없지만 여러 정황으로 보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엄기표 지음 '한국의 당간과 당간지주'중에서*

 


안동운흥동당간지주(安東雲興洞幢竿支柱)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00호 
경북 안동시 운흥동 231 


이 당간지주가 속해 있던 절의 이름은 알 수 없으나 동쪽에 있는 동부동5층전탑과 같은 절의 유적으로 보인다. 한국전쟁 때 일부가 파손된 이 당간지주는 양 기둥에 아무런 조각을 새기지 않아 간결하며, 기둥 사이에는 당간을 꽂는 둥근 받침돌이 놓여 있다. 기둥 안쪽면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홈을 파 놓았다.


윗부분의 일부가 파손되어 완전한 모습은 아니나 소박하고 간결한 모습이며,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짐작된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