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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장의사지 당간지주(莊義寺址 幢竿支柱).서울 종로 본문

☆~당간지주/통일신라

서울 장의사지 당간지주(莊義寺址 幢竿支柱).서울 종로

푸른새벽* 2009. 7. 23. 19:16

 

 

 









 

 









 

 









 





 

 





 





 





 

 장의사지 당간지주(莊義寺址 幢竿支柱)


장의사는 백제와의 싸움에서 전사한 장수 장춘랑(長春郞)과 파랑(罷郞)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659년(무열왕 6) 한산주(漢山州)에 창건된 사찰이었다.고려시대에도 장의사의 중요성이 부각되어 예종,인종,의종 등이 다녀갔다.그리고 고려 초기 광종(949~975)으로부터 극진한 대우를 받았던  원종대사 찬유(元宗大師 璨幽,869~958)가 장의사에서 구족계를 받기도 하였다.조선시대에는 왕실과 관계되는 불제(佛齊),기우 등의 행사가 있었다.태조의 비(妃)였던 신의황후의 기농제(忌農祭)가 있고나서 왕실의 특별한 비호를 받았다.1464년(연산군 10)에는 삼각산 장의사에서 사리가 분신하므로 백관이 서한을 올려 경하하였으며 이날 오색구름이 나타났다고 한다.이후 1506년(연산군 12) 2월에 장의사를 철거하고 그곳에 꽃밭을 만들어 폐사되었다고 한다.


두 지주는 초등학교 운동장 옆에 동서로 세워져 있다.지주 하부가 깊게 매몰되어 기단이나 간대석은 확인할 수 없다.두 지주는 평면 사각 석주형으로 각면이 거칠게 치석되었으며,별다른 조식은 없는 상태이다.지주부 외면의 외곽 모서리는 모를 깎아(6~7cm) 각을 부드럽게 돌리고 있으며
정상부는 내면에서 외면으로 나가면서 평평하다가 외면과 이어지는 부분에서 약하게 호형(弧形)을 이루고 있다.지주 내면에는 간구는 마련되지 않고,간공만을 시공하여 당간을 고정하도록 하였다.동쪽지주의 간공은 원형(지름 12cm)으로 관통되었으나,서쪽 지주는 관통되지 않았고 깊이는 23cm이다.


이와 같이 장의사지 당간지주는 지주 높이에 비하여 너비와 폭이 커서 전체적인 외관이 둔중한 인상을 주고 있다.특히 지주 정상부는 부드러운 호선을 형성하도록 치석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장의사지 당간지주는 호선이 아닌 사선으로 경사지게 외면으로 이어지고 있어 딱딱한 이미지를 준다.간구는 마련하지 않고 간공만 시공한 수법 등은 경주 지역에서 성행한 당간지주들과 상통하고 있으나 지주부의 전체적인 외관은 그렇지 못하다.


한편 당간지주의 건립 시기를 구체적으로 추정할 만한 방증 자료나 유물은 거의 없다.다만 장의사가 신라 왕실과 밀접한 관련은 있었으나 지리적으로 상당히 떨어져 있는 점 등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그리고 지주부의 치석 수법이 정교하지 못하고 둔중한 이미지를 주고 있어 사찰의 창건 시 건립된 것이라기 보다는 당간지주의 건립이 일반화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된 통일신라 중기에서 말기 사이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엄기표 지음 '한국의 당간과 당간지주'중에서*



장의사지 당간지주(莊義寺址 幢竿支柱)

 

보물 제235호

서울 종로구 신영동


장의사지 당간지주는 지금은 세검정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는 장의사의 옛터에 동서로 마주 서 있다.


장의사는 백제와의 싸움으로 황산(지금의 논산으로 추정) 에서 전사한 신라의 장수 장춘랑과 파랑(罷郞)의 명복을 빌기 위해 신라 무열왕 6년(659)에 세웠다고 전한다. 이 당간지주는 마주 보는 기둥의 바깥면 두 모서리를 죽여 약간의 장식을 보이고, 기둥머리는 안쪽 면에서부터 바깥쪽으로 약간 평평하다가 이내 원을 그리며 깎여져 있다. 당간을 단단히 고정시키기 위해 안쪽 면 윗부분 가까이에 둥근 구멍을 뚫어 놓았다. 대개의 경우 당간을 꽂기 위한 장치를 하더라도 기둥머리에 따로 홈을 내는 것이 보통인데, 여기에서는 그 유례를 따르지 않고 있어 흥미롭다. 전체적으로 높이에 비하여 중후한 편이며, 별다른 장식이 가해지지 않은 매우 소박한 모습이다. 세워진 시기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망덕사터의 당간지주와 비교하여 볼 때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