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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 쌍계사(尖察山雙溪寺).전남 진도 본문

☆~ 절집.절터/전 남

진도 쌍계사(尖察山雙溪寺).전남 진도

푸른새벽* 2009. 8. 28. 13:21

 






 

 






 





 











 

 






 






 






 






 






 











 

 






 

진도 첨찰산 쌍계사(尖察山雙溪寺)

 

전남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76번지

 

쌍계사(雙溪寺)는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76번지 첨찰산(尖察山)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 대둔사의 말사이다.

 

절에서 전하기로는 857년(문성왕 19)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뒤 조선시대에 이르는 동안의 연혁은 전하는 것이 없다. 다만 《동사열전》에 보면 무용 수연(無用秀演, 1651∼1719) 스님이 <진도쌍계사사적문>을 지었다고 나와 있으나 아직 글의 내용이 알려지지 않았다. 또한 절에서 전하기로는 <쌍계사사지>가 있었으나 6·25 때 없어졌다고 한다.


절이 지리서 등의 문헌에 등장하는 것을 살펴보면, 1530년(중종 25)의 《신증동국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절이름이 나타나지 않고, 1756년(영조 32)에 김몽규(金夢奎)가 지은 《옥주지(沃州誌)》 및 1759년 왕명으로 편찬된 《여지도서》에 그 이름이 보인다.


조선시대 중후기의 연혁은 1808년(순조 8)에 지어진 <쌍계사시왕전중수기>를 통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이 중수기는 《조선사찰사료》에 실려 있는데, 그 해에 이루어진 시왕전 중수를 기념하면서 아울러 절의 역사를 간략히 적고 있어 참고가 된다.


여기에 따르면 절은 1648년(인조 26) 창건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아마도 중창을 말하는 듯하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옥주지》에도 ‘쌍계사는 1648년에 의웅(義雄) 스님이 창건했다.’는 말이 보인다. 이 때 시왕전이 지어졌으나 1694년(숙종 20)에 소실되었다가 이듬해 중건되었고, 1767년(영조 43)에 다시 중건되었다. 또한 대웅전도 1677년(숙종 23)에 세워졌다.


그러나 1808년 무렵 절은 다시 비가 새고 바람이 들 정도로 퇴락 되었으므로 경린(敬璘) 스님이 중건의 뜻을 세우고 여러 곳의 시주를 받아 절의 면모를 새롭게 했다 한다. 한편 대둔사 13대 강사 가운데 한 분인 아암 혜장(兒菴惠藏, 1772∼1811) 스님의 《아암유집》에 <진도쌍계사시왕전중수상량문>이 있는데 이 글 역시 1808년 중수 때 함께 지은 듯하다. 내용을 보면 당시 이 시왕전은 그 규모나 아름다움으로 인해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또한 범해 각안(梵海覺岸, 1820∼1896) 스님의 《동사열전(東師列傳)》에도 절과 시왕전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여기에 보면 1803년 이후 군수가 절의 누각을 헐고 그 목재로 읍내에 양서재(養書齋)를 지었는데, 1879년(고종 16)에 이규원(李奎遠, 1833∼1901)이 부사(府使)로 와서 양서재를 헐고 목재를 다시 절에 반환하면서 절의 중건을 도왔다고 한다. 각안 스님은 이듬해인 1880년에 절에 들어가 동산(東山)·지순(知淳) 스님과 함께 대법당·시왕전·첨성각을 중수하였다. 그리고 초의 의순 스님이 1863년(철종 14)에 지은 <진도쌍계사대웅전불상개금소> 및 범해 각안 스님의 <옥주쌍계사중수기>에 보면 1863년에 대웅전 삼존불상을 개금하는 등의 불사가 있었다고 한다.


그 밖에 조선시대 후기의 연혁으로는, 심훈 회암(心訓悔庵, 1809∼1887) 스님이 1823년(순조 23)에 평철(平哲) 스님의 제자로 이곳에서 출가했으며, 조선 후기의 고승 삼담 의연(三潭義演) 스님도 이곳에 오랫동안 머무르다 입적했다.


근대에 와서는 1939년에 대웅전과 시왕전을 중수했고, 1940년과 1941년에는 명부전을 수리했다.


최근에 들어와서는 도훈(道薰) 스님의 주석 이후 1980년에 당시 초석만 남아 있던 해탈문을 새로 짓고 1990년에 진설당을 복원했다. 그리고 1992년에 승방인 요마실을 새로 지은 데 이어서 1995년에 시왕전을 중건했다.

*대한불교진흥원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