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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 대안사광자대사비(大安寺廣慈大師碑).전남 곡성 본문

☆~ 풍경소리/전 남

곡성 대안사광자대사비(大安寺廣慈大師碑).전남 곡성

푸른새벽* 2010. 3. 19. 12:55

 

 

 

 

 

 

 

 

 

 

 

 

 

 

 

 

대안사광자대사비(大安寺廣慈大師碑)


보물 제275호
전남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20 태안사 


대안사에 있는 탑비로, 고려시대 승려 광자대사 윤다(允多)의 탑비이다.

광자대사는 대안사를 두 번째로 크게 번성케 한 스님으로, 경문왕 4년(864)에 태어나, 8세에 출가하였다. 사방을 다니다가 동리산에서 수도를 하였고, 그 뒤 가야갑사(迦耶岬寺)에서 계(戒)를 받아, 다시 동리산으로 돌아와서 승려가 되었다. 혜종 2년(945)에 82세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광자’라 내리었다.

 

비는 비문이 새겨진 몸돌이 파괴되어 일부 조각만이 남아 있으며, 거북받침 위에 머릿돌만 얹혀져 있는 상태이다. 거북은 목이 짧아보이기는 하지만, 머리의 표현이나 몸 앞쪽의 조각이 사실적이고 화려하게 표현되어 있다. 등 위로는 비를 얹기 위한 받침대가 새겨져 있는데, 옆면에 보이는 무늬가 어떤 것을 표현한 것인지 확인하기가 어렵다. 머릿돌에는 네 귀퉁이마다 이무기의 머리조각이 돌출되어 있고, 앞면에는 극락조로 보이는 새가 돋을새김되어 있다. 이러한 새 종류의 조각은 연곡사 동부도(국보 제53호)나, 북부도(국보 제54호)에서 잘 나타나 있다.

비몸돌의 파손으로 비문은 거의 판독하기가 힘든 상태이지만 다행히 『조선금석총람』에 일부 글자가 빠진 채로 그 전문이 실려있어, 광자대사가 출가하여 법을 받고 전하는 과정, 공양왕의 옆에서 불심에 대한 문답을 한 일, 고려 태조로부터 극진한 대우를 받았던 일 등을 기록하고 있다.

 

비문의 글씨는 줄을 친 후 새겨 놓았는데, 전체적으로 건강한 힘이 느껴지고 은은한 기운이 감돌고 있어 통일신라에 비하여 서예가 훨씬 발전되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곳곳의 여러 조각들을 통해 다양한 장식을 표현하려 했던 참신한 의도가 엿보이는 이 비는 대사가 입적한지 5년 후인 광종 1년(950)에 세운 작품이다. 
*문화재청자료*

 

 

대안사광자대사비(大安寺廣慈大師碑)


광자대사부도비는 비신이 파괴된 채로 이수와 귀부 사이에 끼어 있다. 2.4cm의 글씨들이 행서체로 씌어 있으나 판독이 어렵다.그러나 다행히도 윤다가 출가하여 법을 받고 전하는 과정,효공왕과의 불심에 대한 문답,고려 태조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은 내용 등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부도비 역시 950년에 세워졌다.


비신을 받치고 있는 거북의 목이 파손된 뒤 보수되었으나,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으며 오른쪽 발도 깨어진 상태이지만,전체적인 조형수법은 매우 사실적이다.거북등 위의 비신받침에 당초무늬인지 구름무늬인지 정확히 분간하기 힘든 연속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이수의 네 모퉁이에는 용머리가 돌출해 있고,맨 위에 십자형 무늬가 돌출된 여의주 셋이 일렬로 세워져 있다.제액 위쪽에 날개를 활짝 편 가릉빈가가 도드라지게 조각되었다.살아 꿈틀거리는 듯 매우 장엄한 가릉빈가 조각은 구례 연곡사에 있는 동부도나 북부도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이수는 혜철의 부도비의 이수와 뒤바뀐 상태이다.왜 뒤바뀌었는지 연유는 알 수 없다.광자대사 부도와 부도비가 본래 있었던 자리는 경내 왼편 끝에 있는 화장실 뒤쪽 산속이다.부도밭에 있는 다른 부도들의 주인은 알 수 없지만,각기 제 멋을 자랑하며 서 있다.광자대사부도비는 보물 제275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