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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石窟庵).경북 경주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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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石窟庵).경북 경주

푸른새벽* 2011. 1. 22. 21:17

 

 









 

 





 





 





 





 





 





 





 





 





 





 

석굴암(石窟庵)

 

세계문화유산
경북 경주시 진현동 994번지. 토함산 기슭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751년) 김대성이 창건하기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년)에 완공하였으며,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石佛寺)라 불렀다. 경덕왕은 신라 중기의 임금으로 그의 재위 기간(742~765년) 동안 불교예술의 전성기를 이루게 되었다. 석굴암은 그러한 시대를 배경으로 탄생하였다. 석굴암의 창건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권제5 <大城孝二世父母 神文王代>가 있다. 여기에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김대성이 밭을 보시한 공덕으로 김문량(金文亮)의 아들로 환생(還生)하였고, 토함산에서 수렵을 하다가 마음에 감동을 느껴 장수사를 창건하였으며, 그로부터 감동받은 바가 있어 자비의 원(願)이 더욱 깊어져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전세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를 세워 신림(神琳)과 표훈(表訓)의 두 성사(聖師)를 청해서 각각 거주하게 하였다고 하는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는 석불사 석실금당의 공사에 관한 설화도 적혀 있다. 천장의 개석을 만들어 올리다가 세 조각으로 갈라지자 김대성이 분노했다가 그 자리에서 잠들었는데, 밤중에 천신(天神)이 내려와서 제 모습대로 만들어 놓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이에 대성이 일어나 남쪽 고개에 급히 올라가 향나무를 태워서 천신(天神)을 공양했다. 그래서 그곳을 향령(香嶺)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설화적인 내용이기는 하지만 현재 석실금당의 개석은 세 조각으로 깨져 있어 설화가 아무 근거 없이 만들어진 것은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위의 기록이 옛 향전(鄕傳)에 기재된 것임을 밝히면서 사내고기(寺內古記)를 인용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경덕왕 때 대상(大相) 대성이 천보 10년 신묘(경덕왕 10년 751년)에 불국사를 세우다가 혜공왕대, 즉 대력 9년 갑인(혜공왕 10년, 774년) 12월 2일에 대성이 죽자 국가에서 이를 완성시켰다. 처음에 유가(瑜伽)의 고승을 청해 이 절에 거주하게 했으며, 그를 계승하여 지금까지 이른다. 그런데 두 기록이 서로 다르므로 어느 것이 옳은지 자세히 알 수 없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제8 신라본기 경덕왕 5년 및 10년 조에 의하면 김대성의 아버지, 김량문은  706년에서 711년 사이에 中侍로 있었고 711년에 사망하였다. 이로 미루어 김대성은 711년 이후 활약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삼국사기"에는 김대정(金大正)이라는 사람이 경덕왕 4년(745년)에서 경덕왕 9년(750년) 사이에 중시(中侍)를 맡았음을 기록하고 있다. 신라 때 이름을 기록하는 방식에 의하면 김대정은 바로 김대성과 통한다고 한다. 김대성는 中侍를 역임했는데, 그의 아버지 김문량이 중시로 활약한 시기를 고려하면 745년에서 750년 사이에 중시로 활약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불국사와 석불사의 창건은 김대성이 중시에서 물러난 이듬해인 751년이 되므로 서로의 기록이 잘 부합된다. 석불사에서 머문 것으로 전하는 표훈도 의상대사의 제자 중 한 사람으로 경덕왕과 혜공왕 때 행적을 보이는 인물이므로 석불사가 혜공왕 때 지어졌고 표훈이 그곳에 머물렀다는 기록도 위의 내용과 부합된다. 따라서 석불사 석실금당의 창건은 경덕왕 10년(751년)에 시작해 혜공왕 10년(774년)에 완공된 것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없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불국사고금창기?에서도 석불사 석실금당의 창건을 이때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전통사찰정보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