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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 등운산 고운사(騰雲山孤雲寺).경북 의성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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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 등운산 고운사(騰雲山孤雲寺).경북 의성

푸른새벽* 2011. 8. 27. 18:43

 

 





 





 









 

 





 





 





 





 





 





 





 





 





 





 





 





 





 





 





 





 





 









 

 





 





 





 





 





 





 





 





 





 

고운사(騰雲山孤雲寺)


경북 의성군 단촌면 구계리 116


고려시대까지의 고운사 역사는 매우 소략한 편이다. 의상의 창건과 최치원 관련 내용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으며, 도선 국사가 봉안한 것으로 전해지는 석조 석가여래좌상은 고운사의 대표적 성보 유산이다. 이후 고려시대의 관련 인물로 운주 조통(雲住照通) 화상과 천우 스님이 있는데, 두 분 스님에 대한 행적은 여타 자료에서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다. 특히 사적비 내용에 의하면 천우 스님은 중국 출신 승려로 알려져 있어 한중불교 교류사 차원에서도 중시되어야 할 인물로 생각되지만, 더 이상의 내용은 확인할 수 없다.

 
고운사의 상세한 역사는 17세기 중반 이후부터 전해진다. 위 연표에서 명기한 17세기의 사적은 신유한의 「고운사사적비」에 근거한 것들이며 따라서 이들 내용은 비교적 정확한 사실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17세기 조선시대의 불교는 극렬한 불교 탄압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진행된 17세기 고운사의 중창 노력은 불교사적으로 매우 의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1695년에 진행된 대규모의 중창 불사는 조선 초기의 부진했던 사세를 회복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18세기의 고운사는 17세기 후반 회복되었던 사세를 그대로 유지하는 한편, 사적비의 건립을 통하여 고운사 역사를 정리하는 시기로서의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아울러 1744년 어첩(御帖) 봉안각을 설치하고 이를 관리할 판사(判事)를 두었다는 내용은 이 시기 고운사의 사세를 유지해 가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조선시대의 불교는 그 성격상 18세기 영·정조대를 기점으로 크게 변화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고운사의 역사에서도 이러한 내용의 변화상을 그대로 살펴볼 수 있어 흥미롭다.

 
고운사는 19세기에 들어와 1803년, 1835년의 두 차례에 걸쳐 화재를 당하는 시련을 겪게 된다. 특히 1835년에 발생한 화재는 대규모에 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후 고운사는 소실된 전각들을 중창·보수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 나갔다. 아울러 이 시기 고운사를 통해 여러 명의 고승들이 배출되는데, 이 시기 불교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함홍 치능 대사와 수월 영민 대사에 대한 내용은 주요인물을 언급하는 자리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20세기 이후 현재까지의 고운사는 경북 지역의 중요한 본사(本寺)로서의 위상을 다져나가는 시기로 평가할 수 있다. 먼저 1902년의 연수전 건립은 구한말 황제의 연명 장수를 축원하기 위해 진행된 불사로, 이를 계기로 영조 대에 이어 고운사가 왕실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위상으로 인해 1906년과 1912년에는 각각 이 지역을 대표하는 본사로 지정될 수 있었으며, 현재도 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의 사격을 지니고 있는 상태이다.


이 시기 고운사의 역사에서 주목되는 또 하나의 사항은 고금당선원(古今堂禪院)과 관련한 내용이다. 1902년경 개설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선원은 일제강점기 고암(古庵)·전강(田岡) 등의 대선사가 수행하였던 곳으로 유명하다. 1950년대부터 폐쇄의 상태에 놓여있던 이 선원은 1980년 근일 스님의 주지 부임 이후 다시 활기를 찾을 수 있었으며, 이제는 한국불교 주요 선원으로서의 위상을 되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한편, 고운사 강원은 일제강점기 시절 지속적으로 존속되었음이 확인되며, 1934년에는 대강백 안진호(安震湖) 스님을 강주로 모시는 등의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기도 하였는데 아쉽게도 현재는 강원이 유지되지 못하고 있다.
*한국전통사찰자료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