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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정림사지(扶餘定林寺址).충남 부여 본문

☆~ 절집.절터/충 남

부여 정림사지(扶餘定林寺址).충남 부여

푸른새벽* 2011. 3. 3. 22:58

 

 











 






 

 






 






 











 

 






 











 

 











 






 

 






 

부여 정림사지(扶餘定林寺址)


사적 제301호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54


부여 시내 중심길인 중앙로에서 동쪽으로 조금만 안쪽으로 들어가면 멀리에서도 담장 너머로 우뚝 솟은 석탑 한 채가 보이는데 그 곳

이 정림사터이다.백제 때의 유구가 거의 남지 않은 부여에서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이 정림사터 탑밖에 없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

을 만큼 이 탑은 백제 시대의 부여를 대표한다.중국 역사서인 『북사』의 '백제전'에는 '寺塔甚多'라고 하여 백제에는 탑이 많다고 기

록되어 있지만 수도인 부여 땅에 남은 것은 오직 이 정림사터 탑뿐이다.


사적 제301호로 지정되어 있는 정림사터는 1942년에 절터를 발굴했을 때에 '大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라고 새겨진 기와조각이 발견

되어 비로소 이 절의 이름이 밝혀졌다.그런데 대평8년은 고려 현종 19년인 1028녀으로 그때에는 이 절의 이름이 '정림사'였으며 그때

까지는 이 절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그러나 백제 때의 이름은 무엇이었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현재 백제 때에 세워진 오층석탑과 고려 때의 석불좌상이 있으며 발굴에서 찾아낸 백제와 고려 때의 기와 조각들과 벼루,소조불상 조

각등은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1979년과 1980년에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해 절의 전체적인 배치를 밝혀 냈다.정림사는 백제 시대의 다른 절들처럼 남북 자오선상에 중

문과 탑과 금당과 강당이 차례대로 놓인 일탑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그리고 절 구역을 전체적으로 회랑이 빙 둘러싸고 있다.다만 특

이한 것은 중문과 탑 사이에 연못을 파서 다리를 통하여 지나가게 한 점이다.지금은 금당 자리에 최근에 복원한 건물만이 덩그렇게 서

있지만 절 전체가 회랑으로 빙 둘러 있는 가운데 긴 네모꼴의 못에 연꽃을 기르고 잉어라도 몇 마리 놓아 길렀다면 시내 한가운데에

자리잡은 매우 운치 있는 공간이었을 듯하다.


기둥자리로 보아 중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아담한 구조였다고 밝혀졌다.또 금당은 2층 기단 위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이는데 정면 5

칸 측면 3칸의 크지 않은 건물로 보인다.강당은 금당보다 조금 더 커서 정면 7칸 측면 3칸의 건물이었다고 여겨지는데,얼마 전에 그

자리에 건물을 복원해 놓았다.정면에 창살문을 단 것으로 보아 아마도 고려 말에 지어진 봉정사 극락전이나 부석사 조사당을 참고하여

고려 시대 건축 모습을 재현한 것으로 보인다.지금은 이 건물안에 석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부여정림사지(扶餘定林寺址)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시기(538-660)의 중심 사찰이 있던 자리다. 발굴조사 때 강당터에서 나온 기와에서 ‘태평 8년 무진 정림

사 대장당초(太平八年 戊辰 定林寺 大藏唐草)’라는 글이 발견되어, 고려 현종 19년(1028) 당시 정림사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즉 고

려시대에 백제사찰의 강당위에 다시 건물을 짓고 대장전이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림사의 주요 건물 배치는 중문, 오층석탑, 금당, 강당에 이르는 중심축선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놓이고, 건물을 복도로 감싸고 있

는 배치를 하고 있다. 그러나 특이하게 가람 중심부를 둘러싼 복도의 형태가 정사각형이 아닌, 북쪽의 간격이 넓은 사다리꼴 평면으로

되어있다.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중문 앞의 연못이 정비되어 있고, 석불좌상을 보호하기 위한 건물은 1993년에 지어졌다. 백제 때에 세워진 5층석

탑(국보 제9호)과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 있다. 출토유물로는 백제와 고려시대의 장식기와를 비롯하여

백제 벼루, 토기와 흙으로 빚은 불상들이 있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