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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봉정사극락전(鳳停寺極樂殿).경북 안동 본문

☆~ 풍경소리/경 북

안동 봉정사극락전(鳳停寺極樂殿).경북 안동

푸른새벽* 2011. 8. 19. 22:44

 

 

 

 

 

 

 

 

 

 

 

봉정사극락전(鳳停寺極樂殿)


국보 제15호  


봉정사 대웅전 영역의 가운데에 있는 화엄강당을 돌아가면 정면에 극락전이 마주하고 있다.정면 3칸 측면 4칸의 단정한 맞배지붕집인 봉정사 극락전으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여겨지고 있다.


1972년에 완전히 해체하여 복원했는데,그때 "신라 문무왕 때 능인대덕이 창건하고 고려 이후 원감.안충.보조.신경.밀암 등 여섯 스님이 무려 여섯 차례나 중수를 하였으나,지붕이 새고 초석이 허물어져 지정 23년에 용수사의 축담 스님이 와서 중수한 것을,지금에 와서 다시 지붕이 허술하여 수리한다"고 쓰인 상량문을 발견하였다.이 글에서 말한 '지금'이란 바로 조선 인조 13년인 1625년이다.그리고 축담 스님이 극락전 지붕을 중수했다는 지정 23년은 그로부터 약 260년 전인 고려 공민왕 12년으로 1363년이다.이때에 공민왕은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 와 있었으므로 극락전의 중수에 공민왕이 관여했으리라고도 여겨진다.


그런데 한 건물이 지어진 후 세월이 지나서 고쳐 짓게 되는 일은 대게 150년에서 200년을 지낸 뒤에 했다.그렇다면 이 건물의 나이는 1363년에서 적어도 150년을 뺀 13세기 초 또는 200년을 뺀 12세기 중엽까지도 거슬러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극락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사농성 오대현에 있는 남선사(南禪寺)의 대전(大殿)과 비교하여,그 건물과 비슷한 옛 방식을 갖추고 있으므로 그와 마찬가지로 8세기경까지로 거슬러 볼 수 있지 않느냐는 주장을 하는 학자도 나오고 있다.


이 건물은 배흘림기둥에 기둥 위에만 포작이 있는 주심포식이며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정면에서 보았을 때 가운데에만 문을 내고 양쪽에는 통풍과 채광이 되는 살창을 단 것은,최근에 복원하면서 조선시대 때 건물의 모습이 변형된 것을 고려시대 건축양식으로 돌려놓은 것이다.좀더 건축적으로 깊이 들어가서 앙ㄹ아보면,기둥 위에 놓인 기둥머리가 굽면이 곡면이며 굽받침이 없는 점,그 위에 놓인 첨차가 끝이 수직으로 강하게 끊어지고 밑면이 두 번 굽은 S자 모양으로 파인데다가 첨차 위에 놓인 소로도 모두 굽면이 곡면인 점 등이 다른 건물에서는 볼 수 없는 매우 오래된 방식이다.또 건물 안쪽에서 보았을 때,대들보 위에 복화반(覆花盤)을 놓고 그 위에 소로를 놓아 중도리를 받치고,중도리 위에 같은 방법을 반복하여 마루도리를 받게 했으며,이 연결이 자연스럽도록 부드러운 곡선으로 된 솟을 합장으로 처리했는데,이처럼 세심한 배려는 1376년에 고쳐지은 부석사 무량수전보다 훨씬 역학적이며 정서을 기울인 예스런 모습이다.이러한 공포와 결구 처리 방식이 고구려 고분벽황 나오는 것과 유사한 점이 많다는 것,고려 초에 삼국시대 복고풍이 일어 건물이나 석탑이 지방양식을 띠고 있는 점 등이 이 건물을 고구려계 건축이라고 보게 하는 요소이다.그러나 이런 모든 전문적인 견해를 접어둔 채 하나의 건물로서 극락전을 다시 바라보면,법당으로서는 매우 소박하고 간결한 건물임을 알 수 있다.공포의 결구 등은 필요한 구조만 있을 뿐 장식이 거의 없다.여기에서 우리는 고려 중기의 단아한 건물의 맛을 느낄 수 있다.극락전은 현재 국보 제15호로 지정되어 있다.


바닥과 주위에 검은 전돌이 깔려 있는데 이런 방식은 고려시대에는 매우 일반적이었다.온돌은 조선 중기까지는 일반화되지 않았으며,주거용 건물이 아닌 이같은 공공건물의 바닥에는 경복궁의 근정전의 예와 같이 조선시대 궁궐의 정전에도 전돌을 깔았다.극락전 안에는 후불벽을 치고 극락전의 주불인 아미타불을 모셔놓았다.불사의 위쪽으로 닫집이 설치되어 있을 뿐 내부 치장은 간소한 편이다.이 닫집은 건축의 구조적인 부분은 아니지만,고려 말의 다포계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는 점이 관심을 끈다.


한편 극락전이 이처럼 오래된 건물인데도 그리 오래돼 보이지 않은 것은 1972년에 해체.수리하면서 단청을 완전히 새로 칠했기 때문이다.기둥과 기둥 사이에 화반 모양의 윤곽을 확실히 한다든가 하는 것은 극락전의 본모양을 살리려는 의도였을 것이다.그러나 그때까지 남아 있던 조선시대 때의 단청도 그 나름대로 역사르 ㄹ지닌 문화재라고 생각한다면 해체.수리라는 것은 좀더 신중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극락전 마당으로 돌아나와 보면 나지막한 담장이 앞을 적당히 두르고 있어,높은 지대에 있는 곳인데도 앞이 비어 허전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그러나 고려시대에 극락전이 중심법당이었다면 앞이 이렇게 비는 것은 뭔가 이치에 맞지 않는다.원래 극락전 앞에는 우화루라는 누각이 있었는데,극락전을 해체.수리하면서 지금은 봉정사의 부속암자인 영산암으로 옮겨가 버렸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봉정사극락전(鳳停寺極樂殿)


국보 제15호  
경북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901 봉정사 


봉정사 극락전은 원래 대장전이라고 불렀으나 뒤에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1972년 보수공사때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지붕을 크게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담긴 상량문을 발견하였는데, 우리 전통 목조건물은 신축후 지붕을 크게 수리하기까지 통상적으로 100~150년이 지나야 하므로 건립연대를 1200년대 초까지 올려볼 수 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보고 있다.


앞면 3칸·옆면 4칸 크기의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기둥은 가운데가 볼록한 배흘림 형태이며,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앞면 가운데 칸에는 문을 달고, 양 옆칸에는 창문을 내었다. 건물 안쪽 가운데에는 불상을 모셔놓고 그 위로 불상을 더욱 엄숙하게 꾸미는 화려한 닫집을 만들었다. 또한 불상을 모신 불단의 옆면에는 고려 중기 도자기 무늬와 같은 덩굴무늬를 새겨 놓았다.


봉정사 극락전은 통일신라시대 건축양식을 본받고 있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