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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사자산 법흥사(寧越 獅子山法興寺).강원 영월 본문

☆~ 절집.절터/강 원

영월 사자산 법흥사(寧越 獅子山法興寺).강원 영월

푸른새벽* 2014. 5. 6. 10:26

 






 






 

 






 






 











 

 






 






 






 






 






 











 

 






 






 






 






 






 











 

 






 






 











 

 






 






 

 영월 사자산 법흥사(寧越 獅子山法興寺)


무릉리 마애여래좌상에서 북쪽으로 달리며 보는 강과 계곡,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이 일대를 "치악산 동쪽에 있는 사자산은 수석이 30일에 뻗쳐 있으며,법천가으이 근원이 여기이다.남쪽에 있는 도화동과 무릉동도 아울러 계곡의 경치가 아주 훌륭하다.복지(福地)라고도 하는데 참으로 속세를 피해서 살 만한 지역이다"라고 하였다.그 경치 뛰어난 사자산 (獅子山)의 남쪽 기슭에 '법흥사(法興寺)'가 자리 잡고 있다.


사자산은 횡성과 평창,영월의 세 경계가 만난 지점에 있다.사자산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백덕산(1350m)이 감싸주고,서쪽으로는 삿갓봉,남쪽으로는 연화봉이 둘러서서 웅장한 산악 맛을 내고 있다.언제부터 사자산이라 불렸는지는 알 수 없으며,'네 가지 재물이 있는 산'이기에 사재산(四財山)이라고도 부른다.그 네 가지 재물은 산삼과 옻나무,가물었을 때 훌륭한 대용 식량이 된다는 흰 진흙과 꿀이다.


법흥사 입구에는 넓은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고,주차장 오른쪽으로 새 건물 공사가 한창이다.왼쪽 숲으로 약간 가려진 곳에 보물로 지정된 징효대사 부도비와 부도가 있다.


신라의 자장율사는 당나라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석가모니의 진신사리와 가사를 전수받아 선덕여왕 12년(643) 귀국한 뒤 오대산 상원사와 태백산 정암사,양산 통도사,설악산 봉정암에 사리를 봉안하고, 마지막으로 영월에 법흥사를 창건하여 진ㄴ신사리를 봉안했다.이때이 절 이름은 흥녕사(興寧寺)였다.그 뒤 징효대사 절중은 신라 말에 쌍봉사를 창건하여 선문을 크게 일으킨 철감선사 도윤에게 가르침을 받아 이 절을 사자산문의 근본 도량으로 삼았다.혜종 1년(944) 중건되고 이후 큰 화재를 만나 1000년 가까이 명맥만 이어오다가,1902년 비구니 대원각이 다시 중건되면서 법흥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쭉쭉 뻗은 키 큰 전나무가 상쾌함을 주는 오솔길을 약 300m 걸어 올라가면 선원이 있고,거기서 다시 오른쪽 길을 따라 산을 오르면 적멸보궁이 나선다.짙은 그늘이 드리워진 산속의 오솔길도 발걸음을 재촉하지만,선원 뒤쪽에 보이는 사자산의 봉우리들이 서기를 머금고 법흥사 도량을 듬직하게 둘러싸며 웅장한 산악의 맛을 내고 있어 한껏 그 위를 올려다보고만 싶기도 하다.


적멸보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보궁 안에 불상을 봉안하지 않은 것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는 사리탑이 건물 뒤쪽 언덕에 있기 때문이다.사리탑은 넓은 방형 지대석 위에 팔각 하대석을 올려놓고 그 위에 중대석을 놓았는데,상하 대석이 각각 앙련과 복련을 장식했다.몸돌은 팔각이며,전후 양면에 문비를 모각하고 나머지 여섯 면에 각각 신장상을 양각하였다.지붕돌은 팔각으로 낙수면이 급하고 각 모서리마다 귀꽃을 장식하였으며,상륜부는 보개와 보주를 갖추고 있다.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는 이 사리탑은 기실 이름을 알 수 없는 한 스님의 부도일 뿐이다.이것이 진신사리를 봉안한 사리탑으로 둔갑한 연유와 시기는 알 수 없으나,다만 진신사리의 영원한 보전을 위해 자장율사가 사자산 어딘가에 사리를 숨겨둔 채 적멸보궁을 지었다고만 알려져 있다.지금도 간혹 사자산 주변에 무지개가 서리는 것은 바로 그 사리가 발하는 광채 때문이라고 한다.


사리탑 옆에 있는 토굴은 자장율사가 수도하던 곳이라고 전해진다.토굴은 낮은 언덕에서 내려오는 완만한 경사를 이용하여 흙으로 위를 덮었으며,봉토를 올리기 위해 토굴 주변에 석축을 올렸다.바깥에서 보기에는 사람이 드나들 수 없이 작게 보이지만 내부는 높이 160cm,깊이 150cm,너비 190cm 정도 되는 비교적 넉넉한 공간이다.


근래에 석가모니 생애를 조각한 판석을 적멸보궁터 아래에 둘러 세워 놓았는데,솜씨가 매우 조잡하여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 중에서

 


영월 법흥사(寧越 法興寺)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 422-1


법흥사(法興寺)는 영월군 수주면 법흥 2리 사자산(獅子山) 남쪽 산자락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 월정사의 말사이다.


이곳은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중심 도장인 사자산문(獅子山門)인 흥령선원(興寧仙院)의 옛터로 1971년 강원도기념물 제6호로 지정되었다.


구산선문이란 하나의 종파로 각 지방에서 선법을 크게 떨친 아홉 개의 사찰을 말하는데, 흥령선원은 9세기경 철감(澈鑑) 국사 도윤(道允) 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


도윤은 당에 유학하여 선종을 공부하고 귀국한 후 강원도 양양의 진전사(陳田寺)와 가지산 보림사(寶林寺)에서 설법 전도하며 선종의 대도량을 열었다. 그 뒤 도윤의 제자 징효(澄曉) 대사 절중(折中) 스님이 이곳 흥령선원에 선문을 여니 각지에서 선중문도(禪衆門徒)들이 모여 종풍이 크게 번창하였다. 징효의 이러한 선법 이후 여종(如宗), 경보(慶甫), 홍가(弘可), 이정(理靖), 지공(智空)등의 제자들에 의해 오랫동안 종풍을 이어갔다. 징효가 신라 말기의 혼란을 피해 891년(진성왕 5)에 경상도 상주(尙州)의 조령(鳥領)으로 피신한 후 흥령선원은 전쟁의 여파로 전소되고 말았다. 그 뒤 중창되었으나 화재로 인해 언제 폐사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944년(혜종 1)에 징효대사보인탑비(澄曉大師寶印?碑)가 건립되었다. 2002년 강원문화재연구소의 지표조사 중 ‘大安五年’이라는 기와가 수습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1089년(선종 6)에 중창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흥령선원의 이러한 전통은 조선시대 영조년간인 18세기에 제작된 ?해동지도(海東地圖)?에 ‘원주목 사자산 법흥사’로 기록되어 있어 그 법맥이 연면히 이어갔음을 알 수 있다.


한참 융성할 당시 흥령선원의 규모를 알리는 석탑 3기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충청북도 제천 장락에 있는 석탑이고, 다음은 주천에 있는 삼층석탑, 나머지 하나는 수주면 무릉리 삼층석탑이다. 이들 석탑들은 모두 흥령사를 찾아오는 신도들을 인도하는 안내 탑이었다. 특히 무릉리 안내탑 앞에는 석조 좌불상이 있었으나 1994년 무렵에 도난당하였다.


옛 흥령사에 중심을 이루었던 지점에서 서북쪽으로 징효대사보인탑비가 있고, 이 곳에서 동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법흥사가 자리잡고 있다.


지금 흥령선원지의 옛 자리에는 큰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듯 거대한 주초석이 남아있다. 이곳에는 약 6m 높이의 석탑이 있었으나, 1931년 큰 홍수로 인하여 무너졌다.


법흥사에는 종이가 없던 시절 인도 영라수 잎에 범어로 기록한 패엽경(貝葉經) 등의 소중한 문화재가 보관되어 있다. 이곳은 선문(禪門) 도장으로 불교의 신비인 방광(放光)이 자주 있는 곳으로 연화봉에서 신비한 빛이 법흥사 계곡 전체를 비춘 적이 많았다고 한다. 
*한국불교진흥원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