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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 법수사지(星州 法水寺址).경북 성주 본문

☆~ 절집.절터/경 북

성주 법수사지(星州 法水寺址).경북 성주

푸른새벽* 2015. 9. 15. 13:19

 

 

 

 

 

 

 

 

 

 

 

 

 

 

 

 

 

 

 

 

 

 

 

 

 

 

 

 

 

 

 

성주 법수사지(星州 法水寺址)


성주군의 수륜면과 합천군의 가야면을 이어주는 백운동 고개는 경북과 경남이 갈라지는 곳이기도하다.성주근의 끄트머리가 되는 이 고개의 턱밑 가야산 자락에 삼층석탑,당간지주,배례석,금당터를 두른 돌축대,그밖에 몇몇 석조물들이 남아 있는 법수사터가 있다.가야산의 산허리를 가로지르는 지방도로가 이 절터를 갈라놓는 게 흠이고 그 길을 따라 어지간히도 들어선 이런저런 시설물들이 거슬리긴 하지만 여느 폐사터와는 또 다른 맛과 여운을 주는 옛 절터이다.


처음 금당사(金塘寺)라는 이름으로 신라 애장왕 3년(802)에 창건되었다는 이 절은 남은 절터의 규모로만 보아도 그 무렵에는 같은 해에 창건된 산 너머 합천 해인사와 쌍벽을 이루던 큰 절이었을 듯하다.근거는 없지만 한때 아홉개의 금당,여덟 개의 종각 등 무려 천 칸이 넘는 건물이 가득했다고 전한다.신라가 망한 뒤에는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왕자가 출가하여 범공(梵空)이라는 법명으로 여기에 머물기도 했다.그 연유는 알 수 없지만 고려 중엽 법수사로 절 이름을 바꾸어 내려오던 이 절은 임진왜란을 넘긴 뒤 조선 중엽에 폐사되었다고 한다.


절이 망하면서 법수사에 있던 불상은 절 뒤편 골짜기,지금은 터만 남은 용기사(龍起寺)로 옮겨졌다가 그 용기사마져 문을 닫게 되자 광무 1년(1897) 해인사로 모셔졌다.해인사 큰 법당 대적광전의 주존불인 비로자나불상이 그것이다.은행나무로 만들어졌다는 이 불상은 높이가 2,35m나 되는 커다란 체구이니 그 불상이 정좌해 있던 법수사의 법당이나 절의 규모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이런저런 사연들을 모두 지켜보았을 석탑과 그밖의 석물들은 절이 없어진 다음 그 절터에 비스듬히 들어앉은 중기마을 위아래에서 천년의 세월을 버티고 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성주 법수사지(星州 法水寺址)


경북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 1214, 1215


경북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에 있다.사역은 중기마을에서 997번 도로와 접한 지역이다.


신라 애장왕 때 창건된 대규모 사찰로,임진왜란 이후 폐사되었다고 한다.『海印寺誌』에 이곳에 있던 비로자나불상과 보살상을 龍起寺로 옮겼다가,1897년 다시 범운선사가 대적광전에 주존으로 봉안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三國遺事』 券 第2 紀異 金傳大王 條에는 법수사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고,『拙藁千百』,『東國輿地勝覽』 卷28 慶尙道 聖州牧 佛宇 條,『與地圖書』,『聖州誌』,『京山誌』,『朝鮮?輿勝覽』,『梵宇攷』에 '伽倻山南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변은 경작지로 개간되었고,삼층석탑과 지름 220cm의 대형 연화대석이 남아 있다.사역은 사방 각 150m로 추정되며,전체 사역은 크게 3단으로 나뉜다.마을 뒤쪽 국도와 접한 지역이 최상단으로 높이 5~6m 내외,길이 118m가량의 'ㄱ'자형 석축대로 터를 형성하였다.
한 단 아래의 경작지에는 많은 양의 와편이 산재해 있고,건물지로 보이는 아랫단에는 대형 초석들이 남아 있다.


주변 민가에서 계단 석재와 면석이 일부 확인된다.사지에 있던 석불은 경북대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한국사지총람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