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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 한용운선생생가지(韓龍雲先生生家地).충남 홍성 본문

☆~ 풍경소리/충 남

홍성 한용운선생생가지(韓龍雲先生生家地).충남 홍성

푸른새벽* 2015. 10. 27. 10:17

 

 

 

 

 

 

 

 

 

 

 

 

 

 

 

 

 

 

 

 

 

 

 

 

 

 

 

한용운선생생가지(韓龍雲先生生家地)


홍성 무량리의 고산사에서 나와 청룡산 옆구리로 난 길을 따라 북쪽으로 가면 결성면 성곡리에 이른다.양옆으로 과수원이 옹기종기 있는 한갓진 길에 자그마하게 한용운 선생 생가로 가는 길을 알려 주는 표지판이 있다.포장된 길을 따라 조금만 들어가면 산자락에 기대 조붓하게 앉아 있는 초가삼간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만난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1879~1944)은 시 「알 수 없어요」를 쓴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그러나 개화기와 일제강점기를 꽉 채운 그의 생애는 독립운동가이며 불교개혁가,사상가로서의 면모도 두드러진다.본명은 정옥(貞玉)이고 용운은 법명이며 법호가 만해이다.


설악산 오세암에서 출가하여 처음에는 선수행을 하였고 블라디보스토크 등 시베리아와 만주를 떠돌면서 우리 민족의 현실과 세계의 동향에 비추어 불교계가 고여 있음을 깨달았다.귀국하여 1910년에 『조선불교유신론』을 쓰고 백담사에 머물면서 대장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을 하였으며 불교잡지를 간행하는 등 불교의 개혁과 대중화,곧 불교의 현실화에 힘썼다.41세 되던 1919년에 불교계를 대표하여 3.1운동의 대표 33인에 참가한 것은 그의 이런 생각과 활동의 결과이다.


3.1운동으로 3년 동안 옥살이를 하고 나온 그는 불교대중화운동에 머물지 않고 민족자주자립운동으로서 민족경제를 살리려는 물산장려운동에 앞장서고 ,나라의 대들보를 기르는 민립대학 설립도 역설하였으며 1927년에 통합민족단체인 신간회를 세우고 이끌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활동은 신간회 봉투에 쓰인 당시 일본 연호 '소화'를 보고 봉투를 몽땅 불태우고는 "소화(昭和)를 소화(燒火)해 버리니 시원하군 !" 했다는 이야기로 잘 표현된다.


한편 문학가로서의 면모는 잘 알려진 대로 「님의 침묵」「알 수 없어요」 같은 시나 「흑풍」「죽음」등의 소설로 드러나는데,불교 사상에 기반을 두고 당대의 현실을 고뇌하면서 독립을 추구한 그의 삶이 충청도 말씨와 부드럽고 섬세한 정서로 표현되었다.


말년에 서울의 성북동에서 심우장(尋牛莊)을 지으면서는 남향을 주춧돌을 녾자 "총독부 건물을 향해 집을 지을 수 없다"며 집을 북향으로 지어 버렸는데 이 집에서 독립운동의 비밀결사단체 '만당'을 조직하는 등 활동하다가 1944년에 69세로 눈을 감았다.


현재의 초가집은 옛터에다가 최근에 복원한 것이다.기념식수와 안내판,석비들이 다소 어색하지만 그래도 바자울에 사립문이 있어 퍽 정답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엮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한용운선생생가지(韓龍雲先生生家地)


충청남도 기념물 제75호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승려이며 시인인 한용운(1879∼1944)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선생은 충청남도 홍성 출신으로 독립운동가로도 활동했으며 호는 만해(萬海)이다.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으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체포되어 3년형을 받았다. 일제에 대항하는 단체였던 신간회를 주도적으로 결성하였는데, 이 신간회는 후에 학생 의거와 전국적인 민족 운동으로 전개되고 추진되었다. 저서로 『님의침묵』, 『불교대전』 등을 남겼으며 그의 사후인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이 수여되었다.

 

낮은 야산을 등진 양지 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생가가 쓰러져 없어진 것을 1992년에 복원하였다.

 

가옥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초가인데 양 옆으로 1칸을 달아내어 광과 헛간으로 사용하고 울타리는 싸리나무로 둘렀으며 바깥에 흙벽돌로 화장실을 만들었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