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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소백산 부석사(榮州 小白山 浮石寺).경북 영주 본문

☆~ 절집.절터/경 북

영주 소백산 부석사(榮州 小白山 浮石寺).경북 영주

푸른새벽* 2017. 4. 19. 10:10






































































































































영주 소백산 부석사(榮州 小白山 浮石寺)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8


부석사는 신라의 삼국통일기인 676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절이다.당나라 종남산 화엄사에서 지엄을 스승으로 모시고 불도를 닦은 의상이 670년에 당나라가 신라를 침공하려 한다는 소식을 전하려고 돌아온 뒤 다섯 해 동안 양양 낙산사를 비롯하여 전국을 다니다가 마침내 수도처로 자리를 잡은 곳이다.


의상이 주석하여 화엄사상을 닦고 수많은 제자를 길러내면서 부석사는 화엄 종찰로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의상 때에 조촐했던 규모도 제법 커져서 대석단 위에 여러 당우를 갖춘 거대한 가람이 이루어졌고,지금의 강릉지방인 명주(溟州)에 장사(莊舍)를 보유할 만큼 재정 기반도 넉넉해졌다.부석사는 초창 때보다도 9세기 이 후 왕권과 더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는데,후삼국이 쟁투를 벌일 때 궁예가 부석사에 쳐들어와서 벽에 그려젼 신라 왕의 초상을 칼로 내리쳤다는 기록으로도 그 사실을 알 수가 있다.


화엄종의 종찰인 부석사에서 하대의 새로운 기운인 선종의 산문을 여는 승려들이 출가 초기에 화엄학을 수학했다는 것은 재미있는 사실이다.신라의 화엄종은 교종이었고 이는 호국불교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는데 신라 하대의 선종은 지방의 호족들을 기반으로 하여 그 사회적 성격이나 기반이 매우 달랐기 때문이다.부석사에는 선종 구산 가운데 동리산파의 개조인 혜철(785~861)이 800년부터 7년 동안 머물렀고 성주산파의 무염(800~888)도 820년 무렵에 여러 해 머물다 당나라로 유학갔으며,문경 봉암사의 창건주인 희양산파의 개조 도헌(824~882)은 9세에 출가하여 17세에 계를 받을 때까지 부석사에서 공부했으며,사자산파 도융의 제자인 절충(826~900)도 15세에 부석사에 와서 화엄경을 들었다.


고려시대에는 원융대덕(圓融大德`964~1053)이 주석하면서 대장경을 찍었는데,그 경판이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고려 말에 이르러 공민왕 때에 국사로 봉해진 진각국사 원응(圓應,1307~1382)은 무량수전과 조사당을 중건하였다.아마 공민왕 7년(1358)에 입은 왜적의 병화로 무너진 전각들을 다시 세워야 했을 것이다.이승휴가 지은 『제왕운기』에 따르면 고려시대에는 선달사(善達寺) 또는 흥교사(興敎寺)라고도 불렀다고 하는데 '선달'이란 '부석'의 뜻을 한자로 풀어 한글로 적은 '선돌'을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추측된다.


세월을 거듭하면서 부석사는 초기에 의상이 터를 잡을 때의 조촐한 모습보다는 규모와 위엄을 지닌 면모를 더해갔다.배불숭유의 조선시대에도 부석사는 웬만한 사세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성종 21년(1490)에 조사당을 중수하고 1493년에는 단청을했다는 기록이 전한다.1555년에 소실된 안양루를 20년 뒤인 1576년에 중건하는가 하면 범종각도 1746년 불탔을 때에 곧바로 다시 지을 만큼 부석사는 힘과 경제력을 갖추고 있었다.19세기 중엽의 기록인 『순흥읍지』에는 무량수전,조사당말고도 취원루,그 북쪽에 장향대,무량수전 동쪽에 상승당,안양문 앞에 법당.선당.승당과 종각 아래에 당우가 대여섯 채나 있던 모습을 전하고 있으니 지금보다도 절이 더 꽉차 보였음직하다.


근대에 들어서는 1916년에 무량수전과 조사당을 해체.수리하였고 무량수전 서쪽에 있던 취원루를 동쪽으로 옮기고 취현암이라고 하였다.1977년부터 1980년까지 전체 사역을 정비하면서 일주문과 천왕문,승당 등을 새로 지었으며,1996년 초에는 유물각을 개수하여 유물전시각으로 꾸몄다.


부석사에는 9세기 때 쌓았다고 여겨지는 대석단과 함께 아름다운 석물들이 많다.무량수전 앞의 석등은 균형미에 장식미를 더한, 뺄 것도 보탤 것도 없는 아름다운 석등이다.절 초입의 늘씬한 당간지주도 석등과 함께 조성되었을것으로 본다.무량수전 마당 동쪽에는 균형미를 갖춘 삼층석탑이 있으며 경내에는 1967년에 인근 동쪽 골짜기의 옛절터에서 옮겨운 삼층석탑 한 쌍과 비로자나불,아미타불도 모셔져 있다.고려시대의 유물로 대표적인 것은 무량수전에 모신 소조아미타여래좌상이며,조사당에 있던 14세기의 고려시대 벽화는 지금 박물관에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이와 함께 고려대장경 각판도 귀중한 유물이다.


부석사의 건물 가운데 무량수전과 조사당은 고려시대의 건축으로 현존하는 우리나라 목조건축사에서 거의 시조격에 해당하는 고식(古式)을 보여준다.물야수전 앞의 안양루와 한 단 아래의 범종각은 조선 후기의 건물이지만 그 터에 알맞은 규모와 특징을 지니고 있다.


부석사의 가장 큰 멋과 맛은 뭐니뭐니 해도 부석사가 앉은 자리,소백산 연봉을 바라보는 시야와 더불어 그러한 시야를 마련해주는 절집의 조화로운 화음,유물들이 어우러짐을 하나하나 겪어하며 느끼는 체험일 것이다.


왕의 명을 받들어 지었다는 부석사,의상은 왜 꼭 이 자리에 절을 지었을까? 부석사는 다른 어느 절보다도 그런 의문이 강하게 들 만큼 그 위치가 독특하다.금강산이나 지리산 같은 어느 명산에 있는 절이라도 이처럼 자리 자체에 의미가 부여되는 절집은 또 없으리라.


이 자리는 다만 뛰어난 경승을 누리는 곳으로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부석사가 자리한 봉황산은 태백산에 등줄기를 대고 있다.태백산 산줄기는 남쪽으로는 가고하산.청량산으로 뻗고,서남쪽으로는 선달산.형제봉.국망봉.연화봉.도솔봉으로 이어지는데,이 서남 방향의 천연 성벽은 곧 지금의 충청북도와 경상북도를 가르는 경계이기도 하다.도솔봉의 바로 위쪽은 지금도 충청북도에서 경상북도로 넘어가는 주요한 길인 죽령이지만,삼국이 각축을 벌이던 당시에는 신라의 변경으로 군사적 요충지였다.또 봉황산 북쪽의 마아령을 넘으면 충북 영춘인데 그곳에는 고구려 온달 장군에 얽힌 전설이 있는 온달성이 있다.양쪽을 동시에 아우르는 곳이 이곳 봉황산 중턱이니,부석사는 이곳을 발판으로 북쪽을 경영하려는 통일의 의지를 심기에 충분한 곳이다.그런 뜻에서 왕은 죽령 근방에 절을 세우기를 명했고 의상은 다섯 해의 탐색 끝에 이 자리를 잡아낸 것이리라.당나라의 침공 소식을 전하려고 유학을 중도에 접고 부랴부랴 돌아온 의상이고 보면 그가 창건한 절이 호국불교의 성격을 지녔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부석사의 참맛은 아래로부터 차근차근 걸어올라가면서 절집이 들어앉은 모습을 하나하나 음미할 때 점점 깊어진다.산자락 경사를 최대한 이용하여 아래에서부터 위로 상승해가는 절의 배치는 절대로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그런 만큼 올라가면서 하나씩 하나씩 발견해내는 기쁨이 남다르다.부석사의 공간을 크게 나누어보면 아래로부터 일주문 공간,천왕문 공간,안양루 공간,무량수전 공간이 차례로 이어지고,무량수전 뒤쪽으로는 조사당과 자인당 공간이 있다.


주차장에서 부석사 쪽으로 접어들면서 자신도 모르게 새 개울을 건너게 된다.흔히 잘 의식하지 못하지만 부석사의 영역은 여기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우리나라 절은 개울을 건너면서 속세에 찌든 몸과 마음을 씻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매표소를 지나 경사 느린 박석길을 따라 은행나무 사이로 어느 정도 가면 '太白山 浮石寺'라는 현판이 걸린 훤칠힌 일주문이 나온다.부석사가 앉은 곳은 봉황산 자락이지만 봉황산은 크게 보면 태백산의 한 봉우리이니,부석사는 태백산 품에 자리하고 있다는 뜻이다.이 일주문은 1980년 부석사를 정비할 때 새로 세운 것이다.일주문을 지나면 양쪽에 빽빽하고 탐스러운 사과나무밭이 펼쳐진다.길의 왼쪽에 삐죽이 솟은 당간지주가 보이는데 이는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이다.그곳에서 멀리 몇 계단 위로 보이는 문이 천왕문이다.당간지주 못미처에는 최근에 세운 부석사 중수기적비가 있는데 너무 커서 어쩐지 어색하다.


천왕문 양쪽으로 사천왕이 버티고 서 있는데,무서운 표정을 지으려 하면서도 어딘지 인간적인 느낌을 준다.1980년에 새로 마련한 이 천왕문과 사천왕은 조선시대 후기의 모습을 본뜬 것이다.


문을 나서면 너른 축대가 양옆으로 펼쳐진 대석단이 있는데,마주하는 이의 기를 압도한다.가파른 계단을 조심스레 오르면 단아한 삼층석탑 한 쌍이 여름이면 탐스러운 불두화가 피어 길게 이어지는 길 양쪽에 서 있다.석가탑을 본받았지만 쌍탑을 이루고 있는 점이나 아담한 크기에 지붕돌이 점점 작아지며 왜소해진 점으로 미루어 볼 때 9세기 쯤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원래 부석사에 세워졌던 것이 아니고 인근 동쪽 골짜기 옛 절터에서 1958년에 옮겨온 것이다.


계속 나아가면 범종루 아래로 길이 이어진다.누각 밑으로 빠져나오면서 오른편으로 안양루를 바라보게 되지만,그보다 먼저 정면으로 마주보이는 곳에 낮은 돌기둥 두 쌍을 볼 수 있다.이것은 괘불지주로,큰 행사가 있을 때 내거는 괘불을 붙들어 맬 장대를 양쪽에서 버텨주는 기둥보조돌이다.그 서쪽에 있는 단정한 집이 조사당 옆에서 옮겨온 취현암인데 본래 17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건물이다.


정면을 바라보면 다시 엄청난 대석단이 눈앞을 가로막고 있다.대석단 위에 있는 안양루의 '安養'은 극락의 다른 이름이니 안양루를 지나면 극락이 되는 셈인데,극락에 다다르는 길은 이리도 멀고 숨가쁘다.다시 계단을 두 단 오르면 이제 안양루 밑으로 해서 무량수전에 이르게 된다.이 안양루 축은 이제까지의 남서향이었던 축과는 살짝 비껴서 정남을 향하고 있다.이런 방향 전환으로 숨을 틔워 엄격한 대칭이나 계층이 주는 위압을 누그러뜨리면서도 수직의 권위는 한껏 살리고 있다.누각 밑으로 빠져 나가면서 자태가 매우 단정한 석등을 마주하게 되는데 무량수전 앞에는 그 외에 아무것도 없다.무량수전 왼쪽 뒤로 큰 바윗돌이 비스듬히 얹혀 있는 부석이 있고,오른쪽 뒤편으로는 1칸짜리 작은 집이 있는데 의상대사와 인연이 있는 선묘를 모신 선묘각이다.


부석을 돌아 아래쪽으로는 삼성각이 있고 그 옆의 요사채는 주지스님의 거처로 쓰이는 삼보전이다.댓가지를 엮은 바자울이 속인의 호기심 어린 발길을 살짝 멈추게 한다.그 앞으로 해서 내려가는 길은 석축을 옆으로 돌아 바라보는 맛도 좋거니와 기왓장으로 단을 이룬 층계를 밟아 내려오는 느낌도 좋다.같은 부석사 안이지만 한 굽이를 돌기만 해도 이리도 다른 공간이 있구나 하는 느낌을 주는 곳이다.


무량수전 마당에서 오른쪽 둔덕에 삼층석탑이 있고, 그 옆으로 나 있는 오솔길을 따라가면 갈래길이 나온다.여기서 동쪽인 오른쪽 길로 가면 의상대사를 모신 조사당이 나오며,서쪽으로 난 오솔길로 가면 응진전과 자인당이 나오는데,이 두 전각은 세운 지 몇십 년이 되지 않은 건물로,조사당을 본떠 지은 맞배지붕집들이다.


서쪽에 자리한 자인당 안에는 석불상 세 분이 모셔져 있다.대좌와 광배가 완전한 양쪽 두 분은 함께 보물 제220호로,화엄종의 주존불인 비로자나불이다.가운데 분은 아미타불로 여겨진다.양쪽의 두 석불은 범종각ㄷ 아래의 쌍탑과 함께 동쪽 골짜기 절터에서,광배가 없는 가운데 분은 부석사 동쪽의 강 너머 약사골에서 옮겨온 것이다.오랜 풍우에 씻겨 부처들은 모습이 많이 닳아진 형편이지만,광배의 조각이 매우 섬세하고 대좌는 단정하고 힘이 있으며 하대석과 중대석에 사자와 연꽃잎.향로.비천상 조각들이 유려하다.


부석사의 전체적인 가람 배치를 보면 아래서부터 점점 위로 올라갈수록 지세가 넓어져서 마치 큰 새가 날개를 활짝 펼친 듯한 형상이다.양 날개깃이 되는 서쪽에는 서부도밭이 있고,동쪽에는 원융국사비가 있는 비각이 있다.그보다 좀 높은 곳에 동부도밭이 있는데 부도들이 나란히 서서 발치 아래를 시원스레 굽어보고 있다.이런 형상은 평면화할 수는 있지만 전혀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사진으로 전체를 담을 수도 없다.


19세기 중엽의 기록인 『순흥읍지』에 전하는 부석사 세부 모습은 지금의 것과 조금 다르다.부석사의 전체적인 배치가 어느 정도 머리 속에 그려졌다면,그 위에 『순흥읍지』에 전하는 다음과 같ㄷ은 부석사의 모습을 덧입혀서 복원해보자.


무량수전과 조사당의 위치는 지금과 같다.조사당의 서편,곧 지금 자인당과 나한전이 있는 곳에는 영산전과 응신암이 있다고 했다.금당(곧 무량수전)의 서쪽에는 취원루가 있으며 그 복쪽에 장향대,동쪽에는 상승당이 있다고 했다.추원루에서는 남쪽으로 300리를 볼 수 있다고도 했다.한 단 내려와서 안양문 앞에 법당이 있다고 했는데 이는 가장 눈여겨볼 만한 기록이다.그 자리는 지금 괘불대 바로 윗단,낮은 석축 한 단으로 높이 자리로서,범종각에 올라서서 보면 정면에 보이는 자리이다.법당의 왼쪽에는 선당,오른쪽에는 승당이 있다고 했으니 그 중심이 되는 법당에는 중심 부처를 모시고,한편으로는 거처하며 한편으로는 거처하며 한편으로는 선수행을 닦는 공간을 마련했던 듯하다.


그 앞에 종각이 있었는데 시야가 넓게 탁 트였고,그 아래 대여섯 개의 당우가 있다고 했는데 지금 요사채가 있는 자리를 이르는가 싶다.그 앞으로 회전문(조계문)이 있고 높이 4~5장이나 되는 큰 섬돌(석축)이 100여 보나 뻗쳐 있으며,그 아래로 수십 보쯤 되는 곳에 일주문이 있다고 하였다.회전문 자리는 대석단을 오른 곳인 듯하며,일주문이 있었던 자리는 지금 천왕문을 세운 자리라고 여겨진다.그렇다면 문 바로 바깥에 당간지주가 세워진 셈이니 이치로도 맞는다.지금의 일주문은 당간지주보다 꽤 앞쪽으로 지어놓았는데 그것은 1970년대 후반 절 영역을 정비할 때,민가들을 정비하면서 절 경역을 넓게 잡아놓으려는 생각에서 그랬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순흥읍지』에는 일주문에서 1리쯤 아래로 영지(影池)가 있어서 "절의 누각이 모두 그 연못 위에 거꾸로 비친다"고 했으니,물속에 떠오른 부석사를 상상해보는 것은 정말 상상만으로도 감탄이 절로 나오는 일이다.그러나 고작 150여 년이 지난 지금,못의 흔적은 간 곳 없고,개울 위쪽의 논이 그 자리가 아니었을까 짐작할 뿐이다.


이런 배치를 염두에 놓고 부석사를 다시 보면 종국에는 무량수전으로 향하는 발길이지만,중심에서 법당의 존재가 새롭게 부각된다.학자들은 그곳이 화엄종의 주존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신 법당이었으리라고 추정하고 있다.그랬을 때 부석사의 전체 계획은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에서 한번 마무리되며,나아가 한 단 더 오른 영역에서 다시 아미타불을 모신 무량수전으로 가도록 축을 한 번 꺾은 셈이 되는 것이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