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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비로사(榮州 毘盧寺).경북 영주 본문

☆~ 절집.절터/경 북

영주 비로사(榮州 毘盧寺).경북 영주

푸른새벽* 2017. 4. 16. 21:48








































































































영주 비로사(榮州  毘盧寺)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삼가리 산13


683년(신라 신문왕 3) 의상 대사(625~702)가 창건한 화엄종 사찰로, 신라 말에는 소백산사(小白山寺)라고도 불렀다.


창건 직후 의상 대사의 10대 제자 중 한 명인 진정(眞定) 대사가 비로사에 머물렀다고 한다. 진정은 출가 전 군인으로 틈틈이 품을 팔아 가난하게 홀어머니를 봉양하고 있었다. 하루는 한 스님이 진정의 집으로 와서 절을 짓는 데 쓸 쇠붙이를 보시해 달라고 청하므로 그의 어머니가 집안의 유일한 재산인 다리 부러진 솥은 시주하였다. 진정은 어머니의 보시를 매우 기뻐하며 질그릇에 밥을 지어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의상 대사가 태백산에서 많은 사람들을 교화한다는 소문을 듣고 효도를 다한 다음 출가하리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지금 바로 출가하도록 엄하게 말씀하였고, 그러한 어머니의 명을 어기지 못하여 3일 만에 태백산으로 가서 의상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그렇게 공부한 지 3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7일 동안 선정(禪定)에 들어 명복을 빌었고, 나중에 그러한 이야기를 의상에게 전하였다. 진정의 지극한 효성에 감동한 의상은 그의 어머니를 위하여 소백산 추동(錐洞)으로 가서 초가를 짓고 제자 3,000명을 모아 90일 동안 [화엄경]을 강의하였다. 강의가 끝나자 진정의 어머니가 진정의 꿈 속에 나타나, “나는 벌써 하늘에서 환생하였다.”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이야기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한다. 소백산 추동은 곧 지금의 비로사 옆 계곡을 말하며, 계곡 상류에는 비로폭포가 있고 부근에 의상 대사가 공부하던 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한다.


 신라 말에는 당대의 고승 진공(眞空, 855~937) 스님이 이곳에서 머물렀는데, 그 때 고려 태조가 방문하여 법문을 듣고 그를 매우 존중하였다. 그가 이 절에서 입적하자 태조는 진공 대사라는 시호와 보법(普法)이라는 탑호를 내려주었다. 1126년(인종 4) 인종이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지은 김부식(金富軾, 1075~1151)으로 하여금 불치아(佛齒牙)를 이 절에 봉안하도록 하였고, 1385년(우왕 11) 환암(幻庵이 중창하였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세조(1417~1468) 때 복전(福田) 5명을 두어 [화엄경]을 강의하도록 하였고, 1468년(예종 1) 김수온(金守溫, 1410~1481)이 사비로 왕실의 복을 비는 도량으로 삼았다.


비로사는 1592년(선조 25)에 일어난 임진왜란 당시 의승군의 주둔지가 되었다. 부산진(釜山鎭)에 상륙하여 문경새재를 넘어 한양으로 가던 왜병의 일부 부대가 강원도 영월로 진격하기 위하여 지름길인 비로사 앞을 가려하자 이를 저지하려던 1,000여 의승군과 격전을 벌였고, 결국 의승군 전원이 순국하고 비로사도 석불상 2위만 남고 모두 불타버렸다.


1609년(광해군 1) 경희(慶熙)가 중건하였다. 이어 1684년(숙종 10) 월하(月下)가 법당과 산신각 등 40여 칸을 중창하였고 1907년 범선(泛船)이 요사를 증축하였다. 그러나 1908년 갑오경장 당시 일어난 병화로 법당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타버렸다. 1919년 범선이 법당을 중수하였고 1927년 요사를, 1932년 다시 법당을 중수하였으나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으로 다시 전 당우가 소실되었다.


최근에는 중건의 불사가 계속되어 1995년 적광전, 1998년 반야실, 2000년 삼성각을 중건하였다. 2001년에는 나한전을 복원하였으며, 심검당을 중수하였다.
*대한불교진흥원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