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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내화리삼층석탑(聞慶內化里三層石塔).경북 문경 본문

☆~ 풍경소리/경 북

문경내화리삼층석탑(聞慶內化里三層石塔).경북 문경

푸른새벽* 2018. 3. 21. 22:27









































































문경내화리삼층석탑(聞慶內化里三層石塔)


문경시 신북면 산양에서 북쪽으로 나 있는 33번 지방도로는 금천과 어울려 뻗어 있는데,내화리에 이르면 문경에서는 보기 드문 꽤 넓은 평지를 만난다.그곳에서 우리는 단아한 삼층석탑 한 기를 마주하게 된다.북.서.남쪽이 모두 산으로 둘러싸이고 오직 낙동강 쪽 동남 방향으로만 열려 있는 지세인 문경으로서는 평지에 절이 자리잡는 경우가 매우 드문데, 이 탑이 있는 내화리는 문경 산골 속의 평지지역이라서 그것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이 터에는 본래 신라시대에 창건된 화장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100년쯤 전에 모두 불탔으며,불상 등은 사불산 대승사로 옮겨가고 삼층석탑만  덩그마니 남았다고 한다.탑 뒤쪽에 소맷돌로 보이는 석재며 돌조각이 몇 있다.절의 흔적으로 남은 것들로 여겨진다.발굴조사에서는 금동불 한 구만이 흙 속에서 나왔을 뿐이다.


나지막한 구릉들이 둘러싼 가운데 우뚝 서 있는 이 삼층석탑은 4.26m의 작지 않은 크기이다.전체적으로 소략하지만 나름대로 균형을 갖춘 잘생긴 석탑으로 보물 제51호로 지정되어 있다.다만 지대석에 바로 상층기단이 놓여 대개 이중기단을 지닌 신라석탑과는 좀 다른 면모를 지니고 있는데,이 점은 문경지방 석탑의 특색이기도 하다.기단부는 크기가 좀 다른 판석 4장을 서로 기대 세웠는데 모서리기둥과 가운데 기둥이 새겨져 있다.굄돌 없이 층층히 얹힌 몸돌과 지붕돌 들은 각각 1장 짜리다.1층 몸돌이 길어 상승감을 주지만 지붕돌이 무겁고 투박해 경쾌한 맛은 나지 않는다.상륜부는 노반만  남고 다 없어져버렸고 상륜부를 지탱했을 철제기둥이 꽂혀 있던 찰주구멍만이 남아 있다.기단이나 굄돌이 생략된 점은 신라 석탑이 점차 지방화되며 간소해져가는 모습으로 볼 수 있다.


1층 몸돌에 13cm 깊이의 사리구멍이 있지만 탑이 무너졌을 때 그 안에 있던 것들은 이미 다 없어져버렸고,무너져 있었던 탑재를 1960년에 바로 세워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문경내화리삼층석탑(聞慶內化里三層石塔)


보물 제51호 
경북 문경시 산북면 내화리 48 


문경시의 깊은 산골짜기에 서 있는 규모가 작고 아담한 3층 석탑이다. 이 절터의 유래나 규모는 알 수 없으며, 발견 당시 3층 몸돌이 근처에 새로 지은 제실(帝室)의 주춧돌로 사용되고 있는 등 탑의 각 부분이 흩어져 있었다. 1960년 9월에 전부 수습하여 복원하였다.


탑은 1단의 기단(基壇)만을 두어 특이한 형태이며, 그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우고 있다. 기단은 남북면에만 모서리에 기둥을 새겨두었고, 동서면에는 남북면의 사잇돌을 밀어 넣어 맞추었다.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한 돌로 구성하였으며, 몸돌의 네 모서리마다 기둥의 모양을 본떠 새겨두었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에서 약간 치켜오르고 있으며, 밑면에는 4단의 받침을 두었다. 머리장식으로는 네모난 노반(露盤)만 남아있는데, 노반을 아래의 3층 지붕돌과 한 돌로 짠 것이 특이하다.


기단 맨윗돌 위의 괴임대가 생략되고, 기단이 1층으로 처리되는 등 시대적 특색을 보이는 석탑으로, 정치·사회적 혼란이 석탑의 양식에도 반영되었던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석탑을 복원하면서 1층 몸돌에서 네모난 형태의 사리를 담는 공간이 발견되었는데, 그 안에 두었을 사리장치는 일제시대에 도둑맞았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