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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 돈암서원(論山遁岩書院).충남 논산 본문

☆~ 풍경소리/충 남

논산 돈암서원(論山遁岩書院).충남 논산

푸른새벽* 2018. 12. 1. 19:08











































































논산 돈암서원(論山遁岩書院)


사적 제383호
충남 논산시 연산면 임리 74외 5필지 


김장생(1548∼1631) 선생의 덕을 기리기 위해 인조 12년(1634)에 건립한 서원이다. 서원은 훌륭한 분들의 제사를 지내고 후학을 양성하던 지방교육기관이며, 김장생은 율곡 이이의 사상과 학문을 이은 예학의 대가로,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을 쏟은 인물이다.

원래 김장생의 아버지 김계휘가 경회당을 세워 학문연구에 힘쓰고 이후 김장생이 양성당을 세워 후진양성을 하였다. 후세에 이 경회당과 양성당을 중심으로 서원을 세우고 김장생을 추모하여 후학에 힘썼다. 현종 원년(1660)에 왕이 돈암이라는 현판을 내려주어 사액서원이 되었으며, 김집, 송준길, 송시열을 추가로 모시었다.

이 서원에는 『황강실기』, 『사계유교』, 『상례비요』 등의 서적들이 보존되어 오고 있으며, 사우(祠宇), 응도당, 장판각 등의 건물들과 하마비, 송덕비가 남아 있다.

이 서원은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이후에도 남아 보존된 47개의 서원중의 하나로,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했던 전통있는 곳이다. 
*문화재청자료*




돈암서원(論山 遁岩書院)


성리학을 국가 통치의 근본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시대에 예(禮)는 곧 유교문화를 대표하는 것이라고 할 만큼 그 비중이 매우 컸다.특히 주자의 《가례家禮》가 전래되면서 유교에서 삼례(三禮)라 하여 유가의 경전으로 중시하는 《禮記》.《儀禮》.《周禮》와 함께 《家禮》는 일상생활을 규율하는 하나의 지침이 되었고,'예'는 하나의 학문적 영역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서울에서 황강(黃岡) 김계휘(金繼輝.1526~1582)의 아들로 출생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1548~1631)은 열 살이란 어린 나이에 구봉(龜峰) 송익필(宋翼弼.1534~1599)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였다.송익필은 당시 이산해.최경창.백광홍.최립.이순인.윤탁연.하응림 등과 함께 8대 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으며,성리학과 예학에도 뛰어난 학자였다.


돈암서원은 김장생의 학덕을 추모하고,그의 학문을 잇기 위하여 1634년(인조 12)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임리 숲말에 창건되었다. 사계의 문인들과 호서지방 각 지역 사족들이 주축이 되어 서원을 건립하였는데,서원 서북쪽에 '돈암'이란 큰 바위가 있어 서원의 이름을 '돈암'이라 하였으며,1659년(효종 10) 사액이 결정되어 1660(현종 1)에 '遁岩書院'이란 사액을 받았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고 남은 47개의 서원 중 하나인 돈암서원이 처음 세워진 곳은 지금 서원이 있는 자리에서 1.5km떨어진 숲말이란 곳이었다.그러나 지대가 낮아 홍수 때는 물이 뜰까지 넘쳐 들어오므로 1880년(고종 17) 현재의 위치인 논산시 연산면 임리 74번지의 서원말로 이건하였다.


1993년 사적 제383호로 지정된 돈암서원은 동향하고 있으며,외삼문인 입덕문(入德門)을 들어서면 서원 경내에 사당인 숭례사를 비롯하여 내삼문,강당인 양성당,동재인 거경재,서재인 정의재,장판각.웅도당.정회당.경희당.전사청 등의 건물과 황강김선생정희당사적비명.연산현돈암서원비기.연산현몬암서원지비.하마비가 있다.사당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55호,웅도당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56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당인 숭례사는 사방에 담장을 둘러쌓은 독립된 영역에 자리 잡고 있는데,정면 3칸,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전면의 1칸은 툇간으로 개방하였고, 내부에는 김장생.김집.송시열.송준길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이들에 대한 제사는 매년 2월과 8월의 중정일에 지낸다.
제향 공간으로 출입하는 내삼문은 세 건물로 분리되어 있으며,사당 전면의 담장은 회벽 사이에 전돌을 박아 여러 가지 문양을 나타낸 꽃담이어서 눈길을 끈다.


숭례사 앞에는 강당인 양성당이 자리 잡고 있다.양성당은 정면 5칸,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서 가운데 3칸은 전면에 퇴를 둔 대청이며,좌우의 각 1킨은 온돌방으로 이루어져 있다.그리고 양성당 앞마당 좌우에는 2000년에 세운 동.서재인 거경재와 정의재가 마주 보고 서 있으며,양성당 앞뜰에 연산현돈암서원비기가 세워져 있다.또한 강당 뒤 서남쪽에는 1926년에 건립한 장판각이 있다.정면 3칸,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서 마루를 깐 내부에는 판가(版架)가 설치되어 있다.


장판각 앞에 위치한 정희당은 1950년대에 건립하였는데,정면 2칸,측면 1칸의 평면을 바탕으로 좌우 측면과 ㅈ어면에 툇간을 덧댄 팔작지붕의 건물이다.그리고 외삼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팔작지붕의 경희당 건물이 보인다.정면 5칸,측면 1칸 반 규모의 이 건물은 1999년에 세운 건물이다.또 경희당 정면으로 마주 바라보이는 웅아한 건물이 웅도당이다.정면 5칸,측면 3칸인 웅도당은 칸살이 넓고 훤칠한 건물로서,돈암서원에서 가장 눈에 띈다.맞배지붕을 이루며 양 측면의 박공면에 풍판을 달았고,그 밑에 다시 처마를 덧달아놓은 강당 건물인데,일단 서원 안에 들어서는 사람을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다.


김장생은 1688년(숙종 14) 문묘에 배향되었으며,돈암서원 외에도 공주의 충현서원(忠賢書院)과 안성의 도기서원(道基書院) 등 10개의 서원에 배향되었다.그의 시호는 문원(文元)이며,저서로는 《喪禮備要》.《家禮輯覽》.《典禮問答》.《疑禮問解》.《近思錄釋疑》.《經書辨疑》등과 시문집을 모은 《沙溪先生全書》가 있다.
*이호일 지음 '조선의 서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