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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 윤증선생고택(論山 尹拯先生故宅).충남 논산 본문

☆~ 풍경소리/충 남

논산 윤증선생고택(論山 尹拯先生故宅).충남 논산

푸른새벽* 2018. 12. 21. 22:53
































































































































논산 명재고택(論山 明齋 古宅)


조선 숙종 때의 학자 윤증의 고택으로 논산에서 공주 쪽으로 23번 국도로 가다가 노성산 못미처에 있다.노성면 교촌리는 옛 이산현(尼山縣)인 파평 윤씨들의 세거지로서,윤증고택은 이 산을 배산으로 하여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윤증이 지었다고 하나 후대에 개축했는지 현재의 건물은 19세기 중엽의 모습을 보인다.그럼에도 전체적으로 향촌 사대부가의 위엄을 갖추고 있어 중요 민속자료 제190호로 지정되었다.


크게 사랑채와 안채,광채로 나뉘어 있는데 구조가 간결하면서도 짜임새가 매우 견실하여 조선 후기 향촌 사대부가 주택의 멋을 잘 보여 주는 집이다.


인공으로 파고 안에는 석가산까지 꾸민 네모난 연못이 있는 넓은 바깥마당을 지나면 바로 사랑채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네 벌로 반듯하게 쌓은 축대 위에 근엄하게 앉은 사랑채는 지주가로서 소작인들에게 한껏 위엄 있게 보였음직하다.두 칸까지 온돌방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대청을 두고 툇마루를 둘러 쓰임새와 시원한 배치를 고루 갖추었다.사랑채 큰방의 아랫목 뒷방 쪽에는 옆으로 밀어젖혀서 다시  앞뒤로 여닫을 수 있는 특이한 문이 있는데 '미닫이 여닫이'라는 재미있는 이름이 붙었다.규마가 작은 뒷방에서 음식상을 차려서 내올 때 문이 네 짝밖에 되지 않아 반만 열면 드나들기가 불편하므로 다 열 수 있도록 고안해 낸 것이다.


사랑채 왼쪽으로 비껴 난 중문을 통해 안채로 들어가게 되는데 문에서 안채가 바로 보이지 않도록 맞은 편에 '내외벽'이라고 하는 널빤지 벽을 쳐서 돌아 들어가게 하였다.이는 문을 열었을 때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지 않게 하고,외간남자가 찾아왔을 때 단번에 서로 얼굴을 마주치지 않고 벽을 사이에 두고 말을 주고 받을 수 있게 한 것이다.


안채는 중문채와 좀 떨어져 있어 튼 ㅁ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가운데 마당을 중심으로 대청이 시원하게 트여 남쪽 지방집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대청 뒷벽의 바라지창으로 내다보이는 뒤뜰은 매우 깔끔하고,장독대 위에는 배가 넉넉해 보이는 충청도식 항아리들이 서로 키를 다투며 옹기종기 모여 앉아 정겨움을 준다.그런가 하면 반질반질하게 길이 들어 품위를 더해주는 우물마루 대청 벽에는 갖가지 옛살림살이들이 걸려 있어 볼거리가 된다.많은 고택이 관리만 하고 살지 않아 죽어 가는 반면에 윤증고택은 사람이 살며 관리하는 집이라 집 자체로서도 살아 있는 느낌을 받을 수 있어서 좋다.


중문 위쪽의 서까래에는 불에 그을린 자국이 있다.갑오농민전쟁 때에 공주로 진격하던 농민군이 불을 놓은 자국이라고 한다.윤증가는 논산 지역의 대지주였던 만큼 농민들의 원성의 대상이었을 터이고 진격하던 농민군이 이 집에 들러 군량미를 내어놓으라고 했으나 순순히 내어 주지 않자 한 무리들이 집을 불사르려고 했다는 것이다.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그때 농민군이 철수하면서 깜빡 잊고 놓고 간 담배통을 윤증가에서 보관하고 있다는 점이다.누구인지는 알 수 없는 한 농민군이 잊고 간 덕에 백통으로 투박하게 만든 네모진 담배통은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난지 10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선 농민군의 몇 안되는 유품이 되었다.


세도 있는 집안으로서 대대로 물려 내려온 윤증가의 유품도 전한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논산 윤증선생고택(論山 尹拯先生故宅)


중요민속문화재 제190호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중요민속자료 제190호. 조선 숙종 때의 학자인 윤증이 건축하였다고 하나 후대에 개수 등이 있었던 듯 현존건물은 19세기 중엽의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다.


이 고택은 파평윤씨(坡平尹氏)들의 세거지인 옛 이산현에 있는 이산(尼山)을 배산(背山)하여 인접한 노성향교(魯城鄕校)와 나란히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집 앞에는 비교적 넓은 바깥마당이 펼쳐져 있고, 그 앞에 인공 방형지(方形池)를 파고 조그마한 석가산(石假山)을 조성한 훌륭한 정원이 꾸며져 있다.


정원에서 4단석계의 축대를 오르면 오른쪽에 앞으로 돌출한 사랑채가 있다. 그 뒤로 연접하여 사랑채 후면에서 1칸 물려 왼쪽으로 一자형의 중문간채가 자리잡고 있다. ? 형의 안채는 북쪽으로 중문간채와 1칸 떨어져 있어 튼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또, 안채의 서익(西翼) 바깥쪽에 광채가 있다. 기와를 얹은 맞담이 중문간채 좌우로 뻗어서 이 광채를 포함한 안채의 양측을 둘러쌌고 배후는 야산이 막아섰다. 따라서, 전체적인 배치는 튼口자의 안채에 독립된 사랑채가 접합된 형태라 할 수 있다.


안채는 중앙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넓은 대청이 있다. 그 왼쪽으로 2칸 윗방, 2칸 안방을 두고, 오른쪽에는 2칸 건넌방, 1칸 마루방이 배치되어 있다. 좌측의 안방 전면에 4칸의 넓은 부엌을 돌출시켰고, 우측의 마루방 앞으로는 2칸 안사랑방과 1칸 작은부엌을 달아내었다.


대청 좌우익의 각 방들은 툇마루나 마루에 의하여 서로 연결되도록 하였다. 대청의 배면은 심벽으로 처리하고 쌍여닫이 골판문을 설치하여 놓았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중앙에 전퇴를 둔 2칸의 사랑방이 놓이고 그 오른쪽에 대청이 배치되었다. 사랑방 좌측에는 1칸 마루방과 하부에 부엌을 둔 작은사랑방이 배치되어 있다. 사랑방 뒤퇴에는 드나드는 입시에 작은마루방이 배설되어 사랑방과 연결되며, 작은사랑방의 뒷방과도 통하도록 되어 있다.


중문간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으로 좌측 두 번째 칸에 중문을 내고 안채가 바로 보이지 않게 1칸 돌아 들어가게 하였다. 안채는 회반죽으로 마감한 막돌허튼층2단쌓기를 한 기단 위에 화강암 덤벙초석을 놓고 모두 방주를 세웠다. 주상에는 주두 없이 도리와 장여만 있는 민도리집이다.


대청·상부가구는 5량가로 동자주 없이 중도리의 장여를 대량 위에 끼워 걸쳐놓은 간소한 구조로 되어 있으며, 종량 위에 제형판대공을 세워 뜬창방을 올려놓고 그 위에 소로를 놓아 장여와 종도리를 받고 있다.


사랑채는 5량가로 안채의 구조기법과 유사하다. 다만, 화강암바른층쌓기 한 기단과 네모뿔의 화강암정평초석을 사용한 것이 다르다. 이 집은 모든 부재의 마감이 치밀하고 구조가 간결하면서 견실하여 아름다운 입면과 함께 신선한 맛을 풍기는 조선 후기 주택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자료*








윤증尹拯(子仁, 明齋, 酉峰, 文成)


1629(인조 7)∼1714(숙종 40).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유봉(酉峰). 성혼(成渾)의 외증손이고, 아버지는 윤선거(尹宣擧)이며, 어머니는 공주 이씨(公州李氏)로 이장백(李長白)의 딸이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리될 때 소론의 영수로 추대되어 송시열(宋時烈)과 대립하였다.


1642년(인조 20) 아버지 윤선거와 유계(兪棨)가 금산(錦山)에 우거하면서 도의(道義)를 강론할 때 함께 공부하며 성리학에 전심하기로 마음먹었다. 1647년 권시(權?)의 딸과 혼인하고,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후 김집(金集)의 문하에서 주자(朱子)에 관해 배웠고, 1657년(효종 8) 김집의 권유로 당시 회천(懷川)에 살고 있던 송시열(宋時烈)에게서 『주자대전』을 배웠다.


효종 말년 학업과 행실이 뛰어난 것으로 조정에 천거되었고, 1663년(현종 4) 공경(公卿)과 삼사(三司)가 함께 그를 천거하여 이듬 해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제수되고 이어서 공조랑·사헌부지평에 계속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682년(숙종 8) 호조참의, 1684년 대사헌, 1695년 우참찬, 1701년 좌찬성, 1709년 우의정, 1711년 판돈녕부사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나가지 않았다. 1669년 아버지가 죽자 거상(居喪)을 주자의 『가례』에 의거하여 극진히 하였다. 학질을 앓다가 1714년 정월 세상을 떠났다.


윤증의 이름을 듣고 공부를 청하는 자가 많았는데, 윤증은 주자의 한천고사(寒泉故事: 주자가 어머니 묘소 곁에 한천정사를 세워 학자들과 담론하고, 여동래와 함께 『근사록』을 편찬한 일을 말함)를 모방하여 거상 중에 강학(講學)하기도 하였다. 거상이 끝나자 아버지와 큰아버지를 추모하여 종약(宗約)을 만들고, 모임을 결성하여 학사(學事)를 부과하기도 하였다.


1680년 상신(相臣) 김수항(金壽恒)·민정중(閔鼎重)이 숙종에게 상주하여 윤증을 경연(經筵)에 부르도록 청했으며, 나중에는 별유(別諭)를 내려 부르기도 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이 때 박세채(朴世采)가 윤증을 초빙하여 같이 국사를 논할 것을 청하고, 부제학조지겸(趙持謙) 역시 성의를 다해 올라오도록 권하였다. 이로부터 여러 번 초빙되고, 박세채가 몸소 내려와 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윤증은 “개인적 사정 이외에 나가서는 안 되는 명분이 있다. 오늘날 조정에 나가지 않는다면 모르되 나간다면 무언가 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우옹(尤翁: 송시열)의 세도가 변하지 않으면 안 되고, 서인과 남인의 원한이 해소되지 않으면 안 되고, 삼척(三戚: 김석주(金錫胄)·김만기(金萬基)·민정중(閔鼎重)의 집안)의 문호(門戶)는 닫히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들의 역량으로 그것을 할 수 있는가. 내 마음에 할 수 없을 것 같으므로 조정에 나갈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박세채는 이 말을 듣고 더 이상 권하지 못했다.


최신(崔愼)이 송시열을 변무(辨誣)하는 것을 핑계로 윤증의 서신을 공개하면서 윤증이 스승을 배반했다고 하였으며, 또 상신 김수항·민정중 등도 윤증이 사감으로 송시열을 헐뜯었다고 상주하였다. 이로부터 선비 간에 논의가 비등하게 일어나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게 되었는데, 송시열을 지지하는 자는 노론이 되고 윤증을 지지하는 자는 소론이 되었다.


윤증이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할 때, 아버지 윤선거가 윤증에게 송시열의 우뚝한 기상을 따라가기 힘드니 송시열의 장점만 배우되 단점도 알아두어야 한다고 가르친 적이 있다. 윤선거는 남의 말을 잘 듣지 않고 이기기를 좋아하는 것을 송시열의 단점으로 보고, 여러 번 편지를 보내 깨우쳐 주려 하였다. 또한 윤휴(尹?)와 예송 문제(禮訟問題)로 원수지간이 되자 송시열과 화해시키려고 하였는데, 송시열은 선거가 자기에게 두 마음을 가진다고 의심하게 되었다.


윤선거가 죽은 후 1673년(현종 14) 그는 아버지의 연보와 박세채가 쓴 행장을 가지고 송시열을 찾아가서 묘지명을 부탁하였다. 그 때 송시열은 강도(江都)의 일(병자호란 때 윤선거가 처자를 데리고 강화도로 피난하였는데, 청나라 군사가 입성하자 처자와 친구는 죽고 윤선거만 진원군(珍原君)의 종자(從者)가 되어 성을 탈출한 사실)과 윤휴와 절교하지 않은 일을 들먹이며, 묘지명을 짓는데 자기는 선거에 대해 잘 모르고 오직 박세채의 행장에 의거해 말할 뿐이라는 식으로 소홀히 하였다.


윤증은 죽은 이에 대한 정리가 아니라고 하여 고쳐주기를 청하였으나, 송시열은 자구만 수정하고 글의 내용은 고쳐주지 않았다. 이로부터 사제지간의 의리가 끊어졌으며, 윤증은 송시열의 인격 자체를 의심하고, 송시열을 ‘의리쌍행(義利雙行), 왕패병용(王覇幷用)’이라고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윤증은 사국(史局)에 편지를 보내 아버지 일을 변명하고, 다시 이이(李珥)가 초년에 불교에 입문한 사실을 인용하여 이이는 입산의 잘못이 있으나 자기 아버지는 처음부터 죽어야 될 의리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유생들이 궐기하여 선현을 모독했다고 윤증을 성토함으로써 조정에서 시비가 크게 일어났다. 송시열이 변명의 상소를 올려 죄의 태반이 자기에게 있다고 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고 그를 전과 같이 대우하지 말라는 교명을 내리게 되었다. 이것을 전후하여 사림과 간관 사이에 비난과 변무의 상소가 계속되고, 양파의 갈등도 심화되었다.


집의김일기(金一夔) 등의 상소로 관작이 일시 삭탈되었다가 중전 복위를 즈음하여 숙종의 특명으로 이조참판에 제수되었다. 사간정호(鄭澔) 등이 다시 상소하여 윤증이 스승을 배반하였다고 헐뜯었으나 숙종은 정호를 벌주며, “아버지와 스승 중 어느 쪽이 더 중한가. 그 아버지의 욕됨을 받는 그 아들의 마음이 편하겠는가.”라고 꾸짖었다.


윤증이 죽은 뒤 1년이 지나서, 유계가 저술한 『가례원류(家禮源流)』의 발문을 정호가 쓰면서 그를 비난하자 다시 노론·소론 간의 당쟁이 치열해졌다. 결국, 소론 일파가 제거되고 윤증과 윤증의 아버지의 관직이 추탈(追奪)되었다.


저서로는 『명재유고(明齋遺稿)』·『명재의례문답(明齋疑禮問答)』·『명재유서(明齋遺書)』 등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