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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보경사원진국사비(浦項 寶鏡寺圓眞國師碑).경북 포항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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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보경사원진국사비(浦項 寶鏡寺圓眞國師碑).경북 포항

푸른새벽* 2019. 2. 14. 15:10

































포항 보경사원진국사비(浦項 寶鏡寺圓眞國師碑)


보물 제252호
경북 포항시 북구 송라면 중산리 622 보경사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송라면 보경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탑비.


보물 제252호. 비신 높이 183㎝, 너비 104㎝, 두께 17㎝. 비는 이수가 없는 형식으로 비신 상단 양 끝을 귀접이 한 규수형(圭首形)이다. 귀부의 머리는 용머리와 한 형태이고, 6각형의 귀갑(龜甲) 안에는 ‘王(왕)’자가 정연하게 새겨져 있다. 비신 상단에는 해서(楷書)로 된 제액(題額)이 있고, 비신 둘레에는 당초문이 새겨져 있다. 당초문과 비신 상단의 귀접이는 고려 중기 이후부터 나타나는 형식의 하나이다.


원진국사 승형(承逈)이 51세로 입적하자 고종은 국사로 추증하고 ‘원진(圓眞)’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비는 입적 3년 뒤인 1224년(고종 11)에 세워졌는데, 비문은 당대의 문신 이공로(李公老)가 지었고 김효인(金孝印)이 썼다. 김효인은 충렬왕 때의 명장 김방경(金方慶)의 아버지로 글씨에 뛰어났다. 이 비문은 구양순체(歐陽詢體)의 글씨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활달함을 잘 살렸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자료*


 


포항 보경사원진국사비(浦項 寶鏡寺圓眞國師碑)


보물 제252호
경북 포항시 북구 송라면 중산리 622 보경사 


보경사에 있는 고려 중기의 승려 원진국사의 탑비이다.

원진국사(1171∼1221)는 13세에 승려가 되어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수도를 하기도 하였고, 왕의 부름으로 보경사의 주지가 되었다. 51세로 입적하자 고종은 그를 국사(國師)로 예우하고, 시호를 ‘원진’이라 내리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간결한 모습으로, 비몸 윗부분의 양 끝을 접듯이 잘라 놓았는데, 이러한 모습은 당시에 유행하던 양식이다.

넓다란 바닥돌과 하나의 돌로 이루어진 거북받침돌은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머리를 하고 있다. 등에는 6각형의 무늬마다 ‘왕(王)’자를 질서정연하게 새겨놓았으며, 등 중앙에는 연꽃을 둘러 새긴 네모난 받침대를 조각하여 비몸을 끼워두게 하였다. 비몸의 둘레에는 덩굴무늬가 장식되어 있는데 이 역시 고려 중기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비문에는 원진국사의 생애와 행적이 기록되어 있으며, 글은 당시의 문신이었던 이공로가 지었고, 김효인이 글씨를 썼다. 비문에 의하면, 비가 완성된 것은 고종 11년(1224)으로 원진이 입적한 지 3년 후의 일이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