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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증심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光州 證心寺鐵造毘盧舍那佛坐像).광주광역시 본문

☆~ 풍경소리/광주광역시

광주 증심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光州 證心寺鐵造毘盧舍那佛坐像).광주광역시

푸른새벽* 2019. 4. 8. 09:44

















































































광주광역시 증심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光州廣域市 證心寺鐵造毘盧舍那佛坐像)


보물 제131호
광주 동구 운림동 56 증심사


광주광역시 동구 운림동 증심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불상.


보물 제131호. 원래 전라남도 광주군 서방면 동계리에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인 1934년 무등산 자락에 위치한 증심사로 옮겨 봉안했다. 불교의 진리를 형상화한 법신 비로자나불로, 높이 90㎝이다. 현재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는 남아있지 않다.


균형 잡힌 신체와 안정감 있는 자세가 돋보이는 신라 하대의 철조비로자나불이다.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육계(肉?)가 높고 뚜렷하며,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螺髮]이 촘촘하게 붙어있다. 눈·코·입 등이 알맞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얼굴은 입체감이 알맞게 드러나며,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어서 온화하게 보인다. 어깨를 펴고 허리를 세우고 있어서 체구가 작은 편임에도 불구하고 당당한 형상이다.


상체는 양감이 별로 없어서 밋밋하게 보이며 허리가 긴 편이지만 결가부좌를 한 두 다리의 폭이 넓어서 안정감을 준다. 법의는 두껍지도, 얇지도 않으며 두 팔과 다리의 굴곡을 드러내준다. 좌우 대칭에 가깝게 양 어깨에 걸쳐진 옷은 자연스럽게 팔을 따라 흘러내리고 있으며, 양 팔에 걸쳐진 옷자락은 일정한 간격으로 옷 주름을 이루고 있다. 폭 넓은 다리는 두께가 얕고, 양감은 별로 없다. 다리 위의 옷 주름도 골이 넓고 투박하지만 비교적 자연스럽게 보인다.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 쥐는 형태의 수인을 지권인(智拳印)이라 하며 이는 비로자나불의 특징적인 도상이다. 『화엄경(華嚴經)』의 주인이자 법의 본체인 법신(法身) 비로자나를 상징하는 지권인이 이 증심사 비로자나불좌상에서는 좌우가 바뀌었다. 즉 왼손이 오른손 검지를 감싸 쥔 모습으로 일반적인 비로자나불과는 반대로 되어 있다. 제작과정의 착오로 보인다. 신라하대에 유행한 철불의 경우 겉틀을 떼어낸 흔적이 다듬어지지 않은 채 거칠게 남아있는데, 이 불상은 겉틀의 흔적이 팔과 배 부분에서만 보여서 공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광주 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9세기 후반의 조각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안정된 자세와 균형 잡힌 신체 비례, 자비로운 얼굴 묘사가 돋보이는 상이다. 9세기 중엽에 조성된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63호),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117호)과 비교했을 때, 조각 수준이나 기술이 상당히 발달된 예로 눈여겨볼 만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자료*




광주광역시 증심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光州廣域市 證心寺鐵造毘盧舍那佛坐像)


보물 제131호
광주 동구 운림동 56 증심사


진리의 세계를 두루 통솔한다는 의미를 지닌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전라남도 광주군 서방면 동계리에 있던 것을 1934년 증심사로 옮겨 온 것이다. 현재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는 잃어버렸지만 불상 자체는 완전한 편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기교있게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에 있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유난히 높고 뚜렷하다. 눈·코·입 등이 알맞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번져 있어서 온화하고 현실적인 인간의 모습을 느끼게 해준다.
전체적으로 신체는 두꺼운 옷에 싸여 있어서 굴곡이 드러나지 않고 있지만 무릎 너비와 적절한 비례를 이루고 있어서 안정적인 느낌을 준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가슴을 넓게 드러내고 있으며 양 팔에 걸쳐진 두꺼운 옷자락은 규칙적인 평행의 옷주름을 이루면서 흘러내리고 있다. 손모양은 왼손이 오른손 검지를 감싸 쥔 형태로 일반적인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형식과는 반대로 되어 있는 것이 특이하다.


이 불상은 조각수법에서 볼 때 뛰어난 작품은 아니지만 통일된 균형미를 보이는 점이 우수하게 평가되며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63호),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117호) 등과 함께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