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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처럼 떠나다

담양 소쇄원(瀟灑園).전남 담양 본문

☆~ 풍경소리/전 남

담양 소쇄원(瀟灑園).전남 담양

푸른새벽* 2023. 8. 13. 14:18

 

 

 

 

 

 

 

 

 

 

 

 

 

 

 

 

 

 

 

 

 

 

 

 

 

 

 

 

 

 

 

 

 

 

 

 

 

 

 

 

 

 

 

 

 

 

 

 

 

 

 

 

 

 

 

 

 

 

 

 

 

 

 

 

 

 

소쇄원(瀟灑園)

소쇄원은 중종 때 사람인 양산보(1503~1557)의 별서정원(別墅庭園)이다.별서란 살림집에서 떨어져 산수가 좋은 곳에 마련된 주거공간을 말하며 이곳에 정자와 더불어 조성되는 정원을 별서정원이라 한다.요즘식으로 말하자면 임천(林泉)속의 별장이라고 할 것이다

소쇄원은 양산보가 30대부터 짓기 시작하여 40대에 완성한 것으로 보이며 이때 면앙정을 지었던 송순과 김인후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양산보는 소년 시절에 마을 뒤의 계곡에서 놀다가 물오리를 따라서 지금 소쇄원이 있는 곳까지 올라온 적이 있었다.그때 언젠가는 이곳에 집을 짓고 살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소쇄(瀟灑)'라는 말은 본래 공덕장(孔德璋)의 '북산이문(北山移文)'에서 나온 말로 깨끗하고 시원함을 의미한다.양산보는 그 뜻을 따서 정원의 이름을 붙이고 그 주인이라는 뜻에서 자기의 호를 소쇄옹이라 했다

소쇄원은 멀리 남쪽으로 무등산을 바라보며 장원봉과 까치봉을 잇는 산줄기를 뒤에 업고 남쪽으로는 슬슬 흘러내린 산비탈에 자리잡았다.뒤편 산에서 흘러내린 물은 폭포와 작은 소를 만들며 정원 가운데를 가로지른 후 대숲으로 빠져나가 청계천으로 합류한다.계곡물 양쪽 비탈에 축대를 쌓아 꽃계단을 만들고 정자들을 올렸으며 동쪽과 북쪽,서쪽 일부에 직선 담을 두르고 남쪽은 틔워놓았다.들어서면서 바로 보이는,짚으로 이은 정자가 대봉대이고 왼쪽으로 계곡 건너에 있는 것이 광풍각,그 뒤로 서너 단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제월당이다

그러나 자연 자체를 뜰로 삼으면서 꼭 필요한 곳에 인공을 가했던 조선 시대 정원에서는 이러한 인공적 축조물이 아니라 터전 전체가 종합적으로 의미를 가진다.건축물들은 그 전체를 가장 잘 살리고 누릴 수 있는 위치에서 전체 경관의 일부로 녹아 있다

이렇게 볼 때 실상 소쇄원은 찻길을 벗어나며 바로 이어지는 대밭에서부터 시작된다.햇빛이 얼금얼금 무늬를 만들며 스며드는 대숲 사이로 계곡물이 흘러나오는 광경은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대숲은 들어가는 길 좌우로 빽빽이 이어지며 서늘한 바람을 일군다.대숲이 끝나가면 앞쪽으로 담장과 대봉대가 보인다.딴 세상이 시작되는 것이다

대봉대는 봉황을 기다리는 곳.봉황처럼 소중한 손을 기다려 맞는다는 다정한 뜻이 담긴 곳이다.그 이름에 걸맞게 예전에는 곁에 오동나무가 있었으나 지금은 고목이 되어 없어졌다

대봉대 아래에는 자그마한 연못이 있고 입구 쪽으로 좀 떨어진 곳에 조금 더 큰 연못이 있다.나무 속을 파낸 홈대와 도랑을 타고 온 계곡물은 머저 작은 못을 채우고 그 물이 넘치면 다시 도랑을 따라 큰 못으로 흘러들게 되어 있다.큰 못에서도 넘쳐난 물은 돌로 만든 수구를 통해 계곡으로 떨어진다.영조 31년(1755)에 만들어진 「소쇄원도」목판에는 두 못에 물고기가 놀고 못가에 물풀이 자란 모습이 그려져 있다.두 못을 연결하는 도랑 중간에는 물레방아가 있어서 계곡으로 물을 날리며 시원한 물소리를 보탰다

대봉대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동쪽 담에는 애양단(愛陽壇)이라고 새겨진 판이 박혀 있다
이 부근은 유난히 볕이 바르다.하서 김인후는 소쇄원의 아름다움 48가지를 노래한 「소쇄원사십팔영(瀟灑園 四十八詠)」가운데 '애양단의 겨울낮(愛陽冬午)'에서 한겨울에 계곡은 아직 얼었는데 이곳의 눈은 모두 녹았다고 노래 했다.양산보는 평소 도연명을 존경했다고 한다.도연명이 했던 대로 그도 동쪽 울타리 아래에 국화를 심었을까? 역시 김인후의 「소쇄원 사십팔영」가운데는 동쪽 울타리 아래 점점이 핀 황국이 늦가을의 풍상(風霜)과 잘도 어울린다는 대목이 있다

애양단을 지나면서 담은 ㄱ자로 꺾인다.그 담에 또 오곡문(五曲門)이라 새긴 판이 박혀 있다.그 옆에는 담 밑에 구멍이 뚫려서 그리로 물이 흘러들도록 되어 있다.돌을 섞어 흙담을 쌓고 기와를 얹으며 죽 이어 오다가 이곳에 이르자 넓적한 바위를 걸쳐 다리를 놓은 후 그 위에 담을 올린 것이다.오곡문이란 담 아래 터진 구멍으로 흘러든 물이 암반 위에서 다섯 굽이를 이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원래는 수구 옆에 일각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냥 트여 있다

소쇄원에 들어온 사람은 이곳에서 외나무다리로 계류를 건너게 된다.다리를 건너기 직전에 구부정한 소나무가 있고 그 아래로 물을 바라보기 딱 좋을 위치에 걸터앉을 만한 바위도 있다.담 밑으로 들어온 물은 굽이를 이루고 폭포를 이루며 정원 가운데로 흘러가고 그 가운데 일부는 나무 홈대에 이끌려 대봉대 아래 연못으로 간다

다리를 건너면 두 단으로 된 꽃계단(花階)을 만난다.이 같은 단은 보통 비탈의 침식을 막을 겸 쌓아서 바라보고 즐길 수 있도록 꽃나무를 심어 꾸미는데 소쇄원에서는 여기에 매화를 심고 매대(梅臺)라 불렀다.매대 뒤의 담에는 '소쇄처사 양공지려(瀟灑處士 梁公之慮,소쇄처사 양공의 조촐한 집)'라는 송시열 글씨의 글자판이 박혀 있다.매대 앞에서 위쪽으로 올라가면 제월당이 있고 아래쪽으로 가면 옛적 선비들이 앉아 즐기던 너럭바위를 지나 광풍각이 있다

제월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왼쪽에 치우쳐서 한칸 방이 있고 나머지 두 칸은 마루로 트여 있으며,마루 뒷벽에 활짝 열 수 있는 문이 달려 있다.이 마루에 앉아 내다보면 시선이 광풍각 지붕 너머로 쭉 뻗다가 앞산에 가 닿는다
「소쇄원도」에는 제월당 왼쪽 앞에 파초가 그려져 있는데 지금은 그 자리쯤에 석류나무가 있다.예전에 제월당 왼편 담 밖에 양산보의 아들들이 사랑채 겸 서재로 쓰던 고암정사와 부훤당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제월당이 주인의 사생활적인 공간이라면 광풍각은 사랑방 격으로 소쇄원의 풍광을 맘껏 누릴 수 있는 중심 공간이다.제월당과 광풍각 사이에는 공간을 나누어 주는 얕은 담과 작은 문이 있다.광풍각에서는 주로 물의 흐름과 폭포,바위에 부딪는 물방울,맞은편에 있던 물레방아의 정취와 물소리 등 수경을 즐기도록 되어 있다.그래서 광풍각의 처음 이름은 침계문방(沈溪文房) 또는 계당(溪堂)이었다 한다.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인데 가운데 한 칸에 방을 들였고 빙 둘러 가며 마루를 깔았다.불을 넣는 아궁이가 뒤편에 있어서 그곳 마루가 다른 것보다 한 단 높게 달려 있는 점이 색달라 보인다.물론 방문은 여름에는 모두 들어 열도록 되어 있다

요즘 광풍각 방 뒷벽에 「소쇄원도」목판을 복사한 그림이 걸려 있다.요모조모 뜯어 보며 지금의 모습에 예전의 모습을 겹쳐 보는 것도 재미있다.광풍각에서 오른편으로 비낀 뒤쪽 단 위에는 복숭아나무를 심고 무릉도원의 풍류를 맛보도록 했는데 지금은 비어 있다.제월당과 광풍각의 현판 글씨는 이 지역 대부분의 현판 글씨와 마찬가지로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다

양산보는 도연명을 좋아했을 뿐 아니라 자기 스승 조광조를 따라서 주돈이를 존경했다.제월당이나 광풍각이니 하는 이름도 송나라 사람 황정견이 주돈이의 사람됨을 가리켜 "가슴에 품은 뜻의 맑고 맑음이 마치 비 갠 뒤 볕이 나며 부는 바람과 같고 맑은 날의 달빛과 같다" (胸懷灑落如光風霽月)고 한 데서 따온 것이다

이곳에는 고경명,김인후,송순,정철,김성원,기대승,백광훈,송시열 등 당대의 이름있는 문인,선비들이 자주 드나들었다.그들이 남긴 여러 시문 가운데 고경명의 「유서석록(遊瑞石錄)」과

앞에서 나온 김인후의 「소쇄원 사십팔영」에 소쇄원의 옛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그들은 소쇄원 안의 바위 하나,물굽이 하나에도 따로 이름을 붙이고 그것이 주는 감흥을 만끽했다

소쇄원 정원은 자연 그대로를 살리면서 꼭 필요한 부분에 적절하게 인공을 가하였다고들 말한다.그 안에 들어가 이곳 저곳 더듬다 보면,함부로 손대는 것을 아꼈을 뿐이지 어디 한 군데도 배려하지 않은 구석은 없음을 느끼게 된다.계곡을 중심으로 한 바퀴 돌면서 자연 경관을 고루 경험하도록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동선, 적당히 걷다가 멈출 만한 곳이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눈 줄 곳,또 앉을 곳 등 모든 것이 세심하고 철저하게 배려되어 있는 것이다.자연과 인공의 행복한 조화란 엉성한 자연 존중이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완벽한 배려와 애정 속에 인공을 가함으로써 오는 자연과의 동화일 것이다

양산보는 자기의 마음이 샅샅이 닿은 이 정원을 매우 아껴서"절대로 남에게 팔지 말 것이며,하나라도 상함이 없게 할 것이며 어리석은 후손에게 물려주지도 말라"고 유언했다.그 덕에 오늘날 우리는 이 조선 시대 민간 정원의 백미를 비교적 원형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소쇄원은 1983년에 사적 제304호로 지정되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담양소쇄원(潭陽 瀟灑園)

명승 제40호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 123번지 등 

자연과 인공을 조화시킨 조선 중기 정원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다.

양산보(1503-1557)는 스승인 조광조가 유배되자 세상의 뜻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깨끗하고 시원하다는 뜻의 정원인 소쇄원을 지었다.

정원은 계곡을 중심으로 하는 사다리꼴 형태로 되어 있다. 4.060㎡의 면적에 기능과 공간의 특성에 따라 애양단구역, 오곡문구역, 제월당구역, 광풍각구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정원 내에는 대나무, 소나무, 느티나무, 단풍나무들로 된 숲이 있다. 주위에는 흙과 돌로 쌓은 자연스러운 담이 있는데 ‘애양단’, ‘오곡문’, ‘소쇄처사양공지려’의 석판과 목판글씨가 담벽에 박혀있다. 소쇄원 안에는 영조 31년(1755) 당시 소쇄원의 모습을 목판에 새긴 그림이 남아 있어,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선비의 고고한 품성과 절의가 엿보이는 아름다운 정원으로, 조선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정원이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