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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신륵사대장각기비(神勒寺大藏閣記碑).경기 여주 본문

☆~ 풍경소리/경 기

여주 신륵사대장각기비(神勒寺大藏閣記碑).경기 여주

푸른새벽* 2023. 10. 14. 14:26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신륵사 대장각기비

 


여주 신륵사대장각기비(神勒寺大藏閣記碑) 

보물 제230호 
경기 여주시  북내면 천송리 282 신륵사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에 있는 고려후기 에 건립된 사적비. 보물.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1383년(우왕 9) 건립. 높이 1.33m. 신륵사에는 원래 극락보전(極樂寶殿) 서쪽 언덕에 대장각이 있었는데, 그것은 고려 말의 이색(李穡)과 승려 나옹(懶翁)의 문도들이 발원하여 경률론(經律論) 삼장(三藏) 즉 대장경을 인출(印出)·수장하던 집이었고, 이 비는 대장각의 조성에 따른 여러 가지를 기록한 석비이다.

『동국여지승람』권7 여주목불우조 (驪州牧佛宇條)에 신륵사의 다른 이름은 보은사(報恩寺) 또는 벽사(?寺)라는 것과 나옹이 일진당(日眞堂)을 세우고 대장각이 있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즉 이색은 선왕 현릉(玄陵)의 자복(資福)과 아버지 이곡(李穀) 및 어머니의 추복(追福)을 빌고자 나옹의 문도와 함께 발원하였고 이숭인(李崇仁)에게 명하여 1380년(우왕 6) 2월부터 만들게 하였다. 비문은 이숭인이 짓고 권주(權鑄)가 정간선을 긋고 자경 2㎝의 해서로 썼다. 권주의 글씨에 대하여 『서청(書鯖)』에는 ‘太古庵碑字 類虞永興(태고암비자 유우영흥)’이라 하였다.

귀부(龜趺)와 이수( 首)는 장방형 복련대석(覆蓮臺石)과 옥개석(屋蓋石)으로 간단하게 변화되었고, 비신(碑身)의 보전을 위하여 몸체 양쪽을 돌기둥으로 단단히 지탱하고 있다. 이것은 이 곳에 앞서 세워진 「여주신륵사보제존자석종비」(1379)와 같은 형식이다.

현재 몸체의 문면(文面)은 크게 파손되어 있어 전문을 판독할 수 없으나, 비음(碑陰)에는 대장단월(大藏檀越) 사부중(四部衆)으로서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를 구분하여 그 성명이 열거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자료*



 
신륵사대장각기비(神勒寺大藏閣記碑) 


보물 제230호 
경기 여주시  북내면 천송리 282 신륵사  

신륵사에 세워져 있는 비로, 극락보전 서쪽 언덕에 있었던 대장각(불경을 만들어 보관하던 곳)의 조성에 관한 여러 가지 기록을 적고 있다. 

길쭉한 사각형의 바닥돌 위에 받침돌을 놓고, 그 위로 비몸을 세운 후 지붕돌을 얹은 모습으로, 비몸 양 옆에 돌기둥을 세워 비몸을 단단히 지탱하도록 하고 있다. 이렇듯 비몸 양 옆에 돌기둥을 세우는 형식은 고려 후기에 이르러 보이는 현상으로 주목되는 부분이다. 

권주(權鑄 )의 글씨로 새긴 비문은 비몸이 크게 파손되어 전체의 내용을 파악할 수는 없다. 비문의 뒷면에는 불경(경률론)을 만들고 비석을 세우는데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다. 

비를 세운 시기는 고려 우왕 9년(1383)이다. 거북 모양의 비받침, 용의 머리가 새겨진 비머리가 고려 후기로 오면서 사각형 받침과 지붕 모양의 머릿돌로 간략화되는데, 이 비도 그러한 예이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