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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고달사지(驪州高達寺址).경기 여주 본문

☆~ 절집.절터/경 기

여주고달사지(驪州高達寺址).경기 여주

푸른새벽* 2023. 10. 21. 11:27

 

 

 

 

 

 

 

 

 

 

 

 

 

 

 

 

 

 

 

 

 

 

 

 

 

 

 

 

 

 

 

 

 

 

 

 

 

 

 

 

 

 

 

 

 

여주고달사지(驪州高達寺址)

사적 제382호  
경기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411-1외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35대 경덕왕 당시 창건된 고달사의 사찰터. 사적.

199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지정면적 5만 8,995㎡. 고달사는 일명 고달원(高達院)이라 부르는데, 전하는 바에 의하면 통일신라시대인 764년(경덕왕 23)에 창건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에 남아 있는 유적·유물을 통하여 신라 하대에 창건되고, 고려시대에 이르러 큰 도량으로 번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고달사지에는 중심 법당자리에 4각형의 큼직한 고달사지 석조대좌(보물, 1963년 지정)가 있어 이 불좌대를 중심으로 남향한 넓은 도량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뒤편으로는 낮은 산 능선에 고달사지부도(국보, 1962년 지정)가 있고, 그 밑으로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보물, 1963년 지정)이 있으며 그 남쪽의 법당지 뒤편에는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보물, 1963년 지정)가 위치해 있는데, 이들 석조물은 모두 고려 초기의 조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원종대사혜진탑비의 비신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데, 이 비문에 의하면 원종대사는 869년(경문왕 9)에 출생하여 958년(광종 9) 8월에 90세로 입적한 당시의 고승이었다. 그의 혜진탑은 977년(경종 2)에 건조하였으며, 이 탑비는 2년 앞선 975년에 건립하였다.

따라서 이 석조물을 중심으로 하여 다른 석조물의 건조연대의 추정은 물론 고달사지의 연혁도 짐작할 수 있다. 산 능선에 위치한 고달사지부도가 누구의 부도인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정제된 조형과 세련된 조각 수법에서 장중함을 엿볼 수 있다.

신라 하대 이래로 나타나는 중대석의 귀두부와 운룡문, 연화문이나 탑신부의 조각 양식과 수법으로 보아 고려 초기의 우수한 작품이며, 신라 말 고려 초에는 이미 큰 도량으로 번창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석불좌는 물론 주변 금당유구에서 볼 수 있는 주춧돌들이 모두 원좌의 기둥굄이 정연함을 볼 때, 역시 10세기를 전후한 때의 거대한 사찰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자료*




여주고달사지(驪州高達寺址)

사적 제382호  
경기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411-1외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에 처음 세워진 후, 고려 광종 이후 역대 왕들의 보호를 받아 큰 절로 성장하였다. 고달사에는 석조 문화재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모두 고달이라는 석공이 만들었다고 전한다. 고달은 가족들이 굶어 죽는 줄도 모르고 절을 이루는 데에 혼을 바쳤다고 하는데, 절을 다 이루고 나서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으며, 훗날 도를 이루어 큰스님이 되니, 고달사라 불렀다는 전설이 있다. 

절터 안에는 깔끔한 모양과 세련된 조각수법의 고달사지부도(국보 제4호)를 비롯하여 훌륭한 문화재들이 많이 남아 있다. 고달사 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와 이수(보물 제6호)는 원종대사의 행적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탑비로 975년에 만들었는데,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시대 초기로 넘어가는 탑비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고달사 원종대사혜진탑(보물 제7호)은 원종대사의 묘탑으로 아름답고 화려한 조각이 있어 고려시대 부도의 조각 수법이 잘 나타나 있다. 그 밖에 고달사지석불좌(보물 제8호)와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긴 고달사지쌍사자석등(보물 제282호)이 있다. 

최근에 발굴조사를 통해 금당터를 비롯한 건물터를 확인하고, 절터의 규모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