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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유’가 새겨진 아미타 불비상(癸酉銘全氏阿彌陀佛碑像).국립청주박물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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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유’가 새겨진 아미타 불비상(癸酉銘全氏阿彌陀佛碑像).국립청주박물관

푸른새벽* 2023. 12. 30. 15:42

 

 

 

 

 

 

 

 

 

 

 

 

 

 

 

 

 

 

 

 

 

 

 

 

 


‘계유’가 새겨진 아미타 불비상(癸酉銘全氏阿彌陀佛碑像)

통일신라시대의 불상.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1960년 충청남도 연기군 비암사(碑巖寺)에서 다른 2점의 불비상(佛碑像)과 함께 발견된 아미타불삼존비상이다.

앞면은 윗부분에 비하여 아랫부분의 너비가 약간 넓은데, 가장자리를 따라서 감실형(龕室形)의 테두리를 새겼다. 그리고 그 안을 한 단 낮게 하여 상부에 커다란 이중의 주형 광배(舟形光背)를 조각하였다. 광배 좌우에는 각각 주악천(奏樂天)이 배치되었으며, 가운데 아미타불삼존상과 그 권속들이 조각되엇다.

본존주11은 복련(覆蓮)주1의 연화좌 위의 네모 반듯한 대좌에 결가부좌하였고, 협시보살과 인왕(仁王) · 나한(羅漢)주2들이 좌우에 새겨져 있다. 얼굴 부분은 마멸되어 확실하지 않으나, 머리 위에 육계(肉?)주3가 높이 솟아 전체적으로 갸름한 모습을 보여준다. 반면 신체는 건장하며 안정된 자세를 이루고 있으며, 시무외인(施無畏印)주4 · 여원인(與願印)주5을 짓고 있는 두 손은 비교적 크게 표현되어 삼국시대 이래의 전통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슴 부근에서 여러 겹의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며 흘러내리고 있는 통견(通肩)의 법의주6는 무릎 아래에서 이중의 Ω자형의 주름을 이루며 네모 반듯한 대좌를 거의 덮어 흐르고 있다. 신체의 굴곡은 옷주름이 두꺼워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두광(頭光)주7은 원형으로, 세 줄의 동심원 안에 연꽃이 배치되고 가장자리에 꽃무늬와 연주문(連珠文)이 장식되었다.

협시보살상은 본존 쪽으로 몸을 약간 튼 자세로 연화좌 위에 서 있는데, 삼국시대의 엄격한 정면 직립의 자세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나 아직 통일신라시대의 삼곡(三曲)자세로까지는 발전되지 못한 형태이다. 머리에는 연꽃을 돌린 간단한 원형 광배를 두르고 있으며, 마멸이 심하여 자세하지는 않으나, 보관(寶冠)을 쓰고 있는 듯하다. 목에는 기다란 영락(瓔珞)을 두르고 있고, 천의는 무릎 부근에서 X자형으로 교차되었다. 한 손은 들어 올려 가슴 근처에서 보주를 들고 있으며, 한 손은 내려 정병(淨甁)주8을 잡고 있다. 이 협시보살상 아래에는 걷고 있는 형태의 사자 두 마리가 조각되어 있다.

보살상 좌우에 있는 금강역사상주9 또한 본존을 향하여 몸을 돌리고 있는데, 왼쪽[向右]의 금강역사상은 왼손에 긴 창을 들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표현된 금강역사상은 당시의 금강역사상 표현과는 달리 갑옷을 입은 모습이며, 허리에서 X자형으로 교차되는 영락 또한 특이하다. 나한상은 모두 4구로서 상체 부분만 조금 보이고 있어, 보살상이나 금강역사상과 동일선상에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들 불상 위로는 거대한 이중의 주형 광배가 조각되었다. 화염형(火焰形)의 연주문으로 광배를 2분하였는데, 내부에는 연화좌에 결가부좌한 화불(化佛)주10 5구가 조각되고, 본존의 두광 바로 위에 커다랗게 보주를 새겨 놓았다. 외부에는 좌우 각 4구의 비천(飛天)을 새기고, 중앙에는 머리 위로 궁전형을 받들고 있는 좌상 1구를 배치하였다. 광배 밖, 즉 비상의 최상부 좌우에는 천궁(天宮)을 받들고 비약하는 천인을 조각하였다.

옆면은 주악천과 용을 새겨 앞면의 아미타세계를 장엄하였다. 이 중 특히 주악상은 악기를 연주하는 동작이 사실적이며 자연스럽게 표현되었고, 용은 비록 상체만 남아 있으나, 용솟음치는 세부 동작이 충실히 묘사되었다.

뒷면은 4단으로 구획되어 각 단마다 연화좌에 결가부좌한 불상이 5구씩 병렬로 조각되었는데, 각 불상 사이사이에 이 비상을 발원한 인명과 관등이 새겨져 있다. 명문에 의하면, 이 비상은 계유년 전씨 일가의 발원에 의하여 조성된 것으로, 계유년은 조각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 직후인 673년(문무왕 13)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비상이 조성된 곳이 옛 백제 지역이며, 발원자인 전씨의 관등 중에 달솔(達率)과 같은 백제의 관등명이 보이고 있는 점 등으로 보아, 백제가 멸망한 뒤 백제의 유민들에 의하여 조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앞면 하단에서 측면 · 뒷면에 이르기까지 비상을 조성한 연대를 비롯하여 발원자 등의 명문이 새겨져 있어, 통일신라시대 초기의 불상 양식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자료*





‘계유’가 새겨진 아미타 불비상(癸酉銘全氏阿彌陀佛碑像)

국보106호
충북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국립청주박물관

충청남도 연기군 비암사에서 발견된 이 삼존석상은 4각의 긴 돌 각 면에 불상과 글씨를 조각한 비상(碑像) 형태이다.

정면은 가장자리를 따라 테두리를 새기고, 그 안쪽을 한 단 낮게하여 아미타삼존상을 조각하였다. 커다란 연꽃 위의 사각형 대좌에 앉아 있는 본존불은 얼굴 부분이 갸름한 모습이며, 신체는 건장하면서 안정된 자세를 이루고 있다. 부처가 설법할 때의 손모양을 하고 있는 손은 비교적 크게 표현되어 삼국시대 이래의 전통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양 어깨를 감싼 옷은 사각형의 대좌(臺座)를 거의 덮고 있으며, 대좌 밑의 좌우에는 사자상을 배치하였다. 둥근 머리광배는 3줄의 동심원 안에 연꽃을 장식하고 있다.

사자 등위의 연꽃무늬 대좌 위에 서 있는 협시보살상은 본존불 쪽으로 몸을 약간 튼 자세로, 얼굴은 훼손이 심하여 알아볼 수 없으나 연꽃이 새겨진 둥근 머리광배가 남아 있다. 본존불과 협시보살의 어깨 사이에는 나한상이 얼굴만 내밀고 있으며, 협시보살상의 양 옆에는 인왕상이 서 있다. 불상 위로는 불꽃무늬가 새겨진 광배가 이중으로 있으며, 안쪽의 광배에는 5구의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다. 광배 밖의 좌우 공간은 한층 더 낮추어 비천상을 새겼다.

양 측면의 하단에는 정면을 향하고 있는 용머리를 조각하고, 그 위로는 연꽃 위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을 표현하였다. 뒷면은 4단으로 나누어 각 단마다 5구씩의 작은 부처가 앉아 있는 모습을 조각하였으며, 불상 사이사이에 사람의 이름과 관직을 새겨 넣었다.

조각이 정교하면서도 장엄하고, 세부 양식에 있어서도 옛 형식을 남기고 있는 점이 계유명삼존천불비상(국보)과 비슷하며, 만든 연대는 삼국통일 직후인 문무왕 13년(673)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자료*



‘계유’가 새겨진 아미타 불비상(癸酉銘全氏阿彌陀佛碑像)

국보106호
충북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국립청주박물관

"불비상(佛碑像)은 돌을 비석처럼 다듬어 앞면이나 네 면에 부처를 조각하고 발원문(發願文: 바라고 원하는 바를 담은 글)을 새겨 놓은 불상이다. 만든 시기와 만든 연유가 기록된 조상기(造像記)는 불교조각의 편년(編年) 기준이 될 뿐만 아니라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계유(癸酉)’가 새겨진 아미타불비상은 비석 모양의 불비상으로, 현재 전하고 있는 7구의 불비상 중 가장 다양한 도상을 보여주고 있다. 조각과 글자 모두 네 면에 새겼으며, 아미타불의 극락정토 장면을 잘 표현하였다. ‘계유년’은 이 불비상을 만든 해가 673년(문무왕 13년)임을 알려준다."
*국립청주박물관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