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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유명삼존천불비상(癸酉銘三尊千佛碑像).국립청주박물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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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유명삼존천불비상(癸酉銘三尊千佛碑像).국립청주박물관

푸른새벽* 2024. 1. 1. 14:06

 

 

 

 

 

 

 

 

 

 

 

 

 

 

 

 

 

 

 

 

 

 

 

 

 

 

 

 

 

 

계유명삼존천불비상(癸酉銘三尊千佛碑像)

충북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국립청주박물관

통일신라시대의 불상.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1960년 충청남도 연기군 조치원읍에서 조금 떨어진 산기슭에 있는 서광암(瑞光庵)에서 발견된 것으로, 일명 서광암 삼존천불비상으로 불려왔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부근의 옛 절터에서 서광암으로 옮겨졌다고 전하고 있어 확실한 원위치는 알 수 없다.

이 석비상(石碑像)은 통일신라 때 연기 지방을 중심으로 조성된 이른바 ‘연기파(燕岐派)’ 불상 조각 중 가장 크다. 이 비상은 낮은 기단 위에 장방형의 비신(碑身)이 수직으로 세워진 전형적인 석비형 비상이다. 비신부는 4면으로 이루어졌으며, 앞면의 삼존불좌상을 중심으로 옆면·뒷면에까지 작은 불상을 가득 배열하고, 좌우로 조상기를 적고 있다.

연화문이 새겨진 보주형 광배(寶珠形光背)를 지닌 본존은 통견(通肩)의 법의를 입고 방형 대좌에 결가부좌하였다. 머리 부분은 파손되었고 가슴에는 ‘卍’자를 새겼다. 손 모양은 같은 해에 제작된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국보, 1962년 지정)과 같은 수인(手印)이다.

연화가 조각된 둥근 두광(頭光)을 지닌 좌우 두 협시보살은 삼국시대 보살상의 특징인 X자형으로 교차된 천의(天衣)를 걸쳤다. 이들의 얼굴은 마멸되었으며 직립한 자세로 연화좌 위에 서 있다. 이 중 오른쪽 보살은 오른손에는 긴 연꽃송이를 쥐고 왼손은 가슴 앞으로 들어 보주(寶珠)를 들고 있다. 그러나 왼쪽 보살은 마멸이 심하여 무엇을 쥐었는지를 확인할 수 없다.

이 비상에는 삼존상 외에 앞면·뒷면·옆면 및 옥개석(屋蓋石)까지 여러 단으로 면을 구획하여, 소형의 불상을 빽빽이 배치하고 있다. 작은 불상들은 모두 두광을 지니고 통견의 법의에 선정인(禪定印: 두 손을 가지런히 배 앞에 모은 손 모양)을 한 상들이다. 그 숫자가 거의 900여 구에 가까운 것으로 보아, 천불신앙(千佛信仰)에 따른 천불상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천불신앙은 중국 북위(北魏) 때부터 그 신앙이 있었던 것이다. 용문석굴(龍門石窟)의 조상명(造像銘)에 그 불명(佛名)이 처음 나타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국보, 1964년 지정)과 원오리 출토 소조불(元吾里出土塑造佛)의 예로 미루어 6세기경부터 그 신앙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단독상이 아닌 천불을 동시에 표현하는 것으로는 이 비상이 가장 오래된 예가 아닌가 한다.

삼존상의 좌우에 각각 4행씩 세로로 선을 그어 해서(楷書)로 명문이 적혀 있다. 명문에 의하면 계유년에 ‘대사 진모씨(大舍眞牟氏)’ 등 250명이 국왕·대신 및 칠세부모(七世父母) 등을 위하여 아미타불과 여러 불보살상을 만든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 불상이 제작된 연기 지방이 신라통일 후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지였다든지, 삼존상에 나타나는 삼국시대의 불상 양식, 가령 보살의 X자형의 천의라든가 삼국시대의 연꽃무늬 등이 앞 시대 양식을 따르는 점으로 보아, 여기에서 말하는 ‘계유년’은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과 마찬가지로 삼국통일 직후인 673년(문무왕 13)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이러한 점은 비상의 발원자인 ‘진모씨’ 등이 백제 성을 따르고 있는 점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점에서 이 석불비상은 백제 귀족을 중심으로 한 백제의 유민이 망국의 한과 심각한 장래를 걱정하면서, 칠세부모라는 상징적인 전체 백성들에게 호소하고, 아울러 조상들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향도(香徒: 화랑도)가 되어 조성한 불상이다. 백제의 불상 양식을 계승하려 한 백제 유민들의 의지가 충실히 반영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자료*





계유명삼존천불비상(癸酉銘三尊千佛碑像)

국보
충북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국립청주박물관

충청남도 연기군 조치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서광암(瑞光庵)에서 발견된 작품으로, 비석 모양의 돌에 불상과 글을 새겨 놓은 것이다. 사각형의 돌 전체에 불상을 새겼는데, 앞면의 삼존불(三尊佛)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글이 새겨져 있고, 그 나머지 면에는 작은 불상을 가득 새겨 놓았다.

삼존불은 연꽃무늬가 새겨진 반원형의 기단 위에 조각되어 있는데, 4각형의 대좌(臺座)에 앉아 있는 중앙의 본존불을 중심으로 양 옆에 협시보살이 서 있다. 본존불은 옷을 양 어깨에 걸쳐 입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상체가 많이 닳아서 세부 모습을 알아볼 수 없다. 특징적인 것은 불상이 입고 있는 옷이 무릎 아래로 길게 흘러 내려와 대좌까지 덮고 있다는 점이다. 양 옆의 협시보살도 손상이 많아 세부 모습을 살피기는 어렵지만, 무릎 부분에서 옷자락이 X자형으로 교차되고 있어 삼국시대 보살상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불상들의 머리 주위에는 연꽃무늬와 불꽃무늬가 조각된 머리광배가 다른 부분에 비해 파손이 덜 된 상태로 남아 있다.

이 삼존불상 외에도 사각형의 돌 전체에 일정한 크기의 작은 불상들이 규칙적으로 새겨져 있는데, 깨진 부분에 있었을 불상들까지 감안한다면 천불(千佛)을 표현하려고 한 것 같다. 이들 작은 불상들은 모두 머리광배를 지니고 있으며,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다.

이 작품은 삼존불 좌우에 새겨져 있는 글을 통해 볼 때 신라 문무왕 13년( 673)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백제 유민들이 망국의 한과 선조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든 작품이란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