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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축산 통도사(靈鷲山 通度寺)입구에서 山門까지. 본문
영축산 통도사(靈鷲山 通度寺)
경남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583
통도사(通度寺)는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583번지 영축산(靈鷲山)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다. 우리나라에 수많은 사찰이 있지만, 그 중에 대표적인 사찰을 삼보(三寶)사찰이라고 한다. 즉 불·법·승의 삼보를 대표하는 통도사·해인사·송광사를 말한다. 삼보사찰 가운데서도 통도사는 불보사찰로서 이름그대로 ‘부처님의 절’이라는 으뜸의 자리를 차지한다.
통도사는 646년(선덕여왕 15)에 신라의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하였다. 창건의 시말이 『삼국유사』 「의해(義解)」 제5, <자장정률(慈藏定律)>에 자세히 전하는데 간추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대덕 자장은 김씨이니 본래 진한(辰韓)의 진골 소판 무림의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는 청관(淸官)의 요직을 지냈다. 그러나 뒤를 이을 아들이 없으므로 삼보에 마음을 돌려 천부관음에게 아들 하나 낳기를 바라고 이렇게 축원했다. “만약 아들을 낳게 되면 그 아이를 내놓아서 법해의 진량으로 삼겠습니다.” 홀연히 그 어머니의 품 안으로 별 하나가 떨어져서 들어오는 꿈을 꾸고 바로 태기가 있어 아기를 낳았는데, 석존과 같은 날이므로 이름을 선종량이라 했다. 그는 정신과 뜻이 맑고 슬기로웠으며 날로 문사에 풍부해지고 속세의 취미에 물들지 않았다. 두 부모를 일찍 여의자 이후 속세의 시끄러움을 싫어하여 문득 처자를 버리고 자기의 논밭을 내어 원녕사라는 절을 세웠다. 때마침 조정에서는 재상 자리가 비어 있었는데 자장이 문벌로서 물망에 올랐다. 왕이 여러 번 불렀으나 그는 끝까지 나가지 않았다. 이에 왕이 칙령을 내렸다. “만일 나오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 이를 듣고 자장이 말했다. “내 차라리 하루 동안 계율을 지키다가 죽을지라도 백 년 동안 계율을 어기며 사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 말을 듣고 왕은 그가 출가함을 허락했다. 변방에 태어난 것을 스스로 탄식하던 자장은 중국으로 가 대화(大化)하기를 구했다. 인평 2년(636)에 왕명을 받아 문인인 실 등 승려 10여 명과 더불어 서쪽 당나라 청량산에 가서 성인을 뵈었다. 정관 17년(643)에 신라 선덕왕의 요청으로 귀국하였다. 본국에는 아직도 불경과 불상이 구비되지 않았으므로 자장은 대장경 1부와 여러 가지 번당(幡幢)·화개(花蓋) 등에 이르기까지 복리(福利)가 될 만한 것을 많이 가지고 돌아왔다. 그가 본국에 돌아오니 온 나라가 그를 환영하고 왕은 그를 분황사에 머물게 하였다. 스님은 국왕의 협조로 신라의 승관제도를 차례차례 제정해 나갔다.
점차 출가하려는 사람이 늘어나자 스님은 통도사를 세우고 계단(戒壇)을 쌓아 사방에서 오는 사람들을 제도하였다. 자장이 세운 절과 탑이 무려 10여 곳인데 세울 적마다 반드시 이상스러운 상서(祥瑞)가 나타났으므로 그를 받드는 신도들이 거리를 메울 만큼 많아서 며칠이 안 되어 완성되었다.스님이 쓰던 도구, 옷감, 버선과 태화지의 용이 바친 목압침과 석존의 가사들은 모두 통도사에 있다.'
불교를 수용한 이래 많은 위인과 고승이 출현하였지만, 자장율사는 특히 고대불교의 제도와 규율을 정립한 분으로 유명하다. 신라시대에 ‘율사’라는 호칭은 오직 자장 스님의 이름에만 붙는 고유명사처럼 인식될 정도다. 통도사는 창건과 함께 스님이 가져 온 불사리와 가사, 그리고 대장경 400여 함을 봉안하여 초창 당시부터 국가적 사찰로 중요시 되었다. 불사리와 가사를 봉안함으로써 이른바 ‘불보사찰’이 되었고, 역사상 최초로 대장경을 봉안한 사찰이었다.
절 이름 통도사는 다양한 뜻을 지녔다. 창건 이후 모든 스님은 이곳의 금강계단(金剛戒壇)에서 득도한다는 뜻, 또는 만법을 통달하여 일체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도 있다. 창건 당시 가람의 모습은 자세하게 전하지 않는다. 오늘날과 같은 대찰이 아니고 계단을 중심으로 몇몇 법당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짐작한다.
고려시대 들어 국가불교의 발전과 함께 사세가 확장되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여러 석조물들이 대부분 선종대(1083~1094)에 집중적으로 조성되었다. 특히 절의 동남쪽 2㎞ 지점에 있는 통도사국장생석표(通度寺國長生石標)는 산천의 비보(裨補)를 위하여 세웠지만, 당시 사역의 경계를 나타내는 것이므로 절의 사세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이 무렵에 조성된 성보로는 금강계단 상부의 석종형 부도를 비롯하여 극락전 앞의 삼층석탑, 배례석, 봉발대 등이다.
통도사의 역사는 곧 금강계단의 역사로 대변된다. 고려시대 들어 불사리를 봉안한 금강계단은 여러 차례의 우여곡절을 겪는다. 1235년(고종 22) 당시 상장군(上將軍) 김이생(金利生)과 시랑(侍郎) 유석(庾碩)이 계단의 석종을 들어내고 사리를 참배하였다. 조성 이후 처음 세상에 출현한 것인데 사리함이 약간 파손되어 있었다. 유석이 새로운 수정함에 담아 다시 봉안하였다. 몽고의 침략을 받은 이후인 1264년(원종 5) 무렵 절에는 황화각(皇華閣)이라는 건물이 있었다. 몽고의 사신들이 빈번히 들어와 금강계단을 참배하자 이들이 머무르던 전각이었다. 고려 말인 1377년(우왕 3)에는 왜적이 침입하여 금강계단의 사리를 약탈하려다 저지당했고, 2년 뒤에도 다시 시도하였다. 당시 주지 월송(月松) 대사가 사리를 짊어지고 산속으로 달아나 간신히 위기를 모면하였다. 당대의 유명한 문인 이색(李穡)이 「양주통도사석가여래사리기(梁州通度寺釋迦如來舍利記)」에서 월송 스님이 1379년 8월에 진신사리와 가사 등을 가지고 개성의 평리(評理) 이득분(李得分)을 만난 일을 기록하였다. 결국 사리를 보다 안전한 곳으로 옮기기로 하여 개성의 송림사로 이전하였다. 이 때 사리가 무수히 분신하는 기적을 보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태조는 송림사에 있었던 사리를 다시 한양의 흥천사(興天寺)로 옮겼다. 흥천사가 자신의 수릉(壽陵)인 정릉의 원찰이었기 때문에 이 곳 사리각의 석탑에 봉안한 것이다. 태종대에는 명나라의 칙사 황엄(黃儼)이 황제의 명을 빙자하여 사리를 요구하였다. 이에 태종은 어이없게도 전국의 사찰에 봉안하고 있었던 사리 558과를 모아주는 일을 저질렀다. 이때 흥천사에 있던 금강계단의 사리도 중국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그러나 조선시대 중기에도 사리의 일부가 남아있었다. 임진왜란의 발발과 함께 영남지방이 왜구의 수중에 들자 의승장 사명(泗溟) 스님이 통도사의 사리를 두 상자에 나누어 금강산에 있던 스승인 서산(西山) 대사에게 보냈다. 이에 서산 대사는, “영남이 침해를 당하고 있으니 이곳 역시 안전한 장소는 못된다. 영축산은 뛰어난 장소이고 문수보살이 명한 곳이다. 계를 지키지 않는 자라면 그에게는 오직 금과 보배만이 관심의 대상일 것이고 신보(信寶)가 목적이 아닐 것이니, 옛날 계단을 수리하여 안치하라.” 고 하였다. 이에 1함은 돌려보내고 나머지 1함은 태백산 갈반지(葛盤地)에 안치하였다. 사명 대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통도사 불사리는 왜적에게 약탈당하였다. 하지만 당시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던 동래 출신의 옥백(玉白) 거사가 1603년(선조 36)에 이를 되찾아와 통도사에 다시 봉안하였다. 이후 불사리를 안치한 금강계단은 여러 차례의 중수가 있었다. 1652년(효종 3)에는 정인(淨人) 대사가, 1705년(숙종 31)에는 성능(性能) 대사가 각각 중수하였다. 이후 1743년(영조 19), 1823년(순조 23)의 중수 기록이 전한다.
이후 근대에 들어 1911년 대대적 중수가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아래 시행되면서 원형과 달라졌다. 이밖에 통도사의 역사는 천삼백여 년을 지내오면서 수많은 변화가 있었다.
*대한불교진흥원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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