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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축산 통도사(靈鷲山 通度寺)上爐殿 구역 본문

☆~ 절집.절터/경 남

영축산 통도사(靈鷲山 通度寺)上爐殿 구역

푸른새벽* 2006. 6. 5. 23:21

 





 

 









 





 





 

 





 





 





 









 

 





 









 

 





 

영축산 통도사(靈鷲山 通度寺) 上爐殿 구역

웅장한 영축산록에 자리잡은 통도사는 50여 동의 전각과 20개소의 암자를 거느린 우리나라 최대 사찰의 하나이다.646년 자장율사가 창건하여 1300여 년 동안 끊임없이 고쳐짓고 확장하고 변화하여 현재의 모습에 이르렀다.


자장은 중국 종남산의 문수보살으로 부터 부처의 진신사리 1백과를 얻어와 경주의 황룡사, 울산  태화사,그리고 양산의 통도사에 나누어 봉안하였다.통도사 대웅전 뒤에는 금강계단이 설치되었고 이 곳에 봉안된 불사리로 인해 한반도 최고의 불보사찰이 되었다.


전체 가람은 입구 쪽부터 하로전 - 중로전 - 상로전의 3개 영역으로 나누고 각 영역에는 불전을 관리하는 노전을 따로 두어 3노전체로 운영 하고 있다.


영산전.대적광전.그리고 금강계단의 건물터가 7세기경에 이미 조성된 점으로 미루어 이러한 3원체 가람 형식은 자장의 창건 당시부터 설정 된 것으로 추정된다.당시에 각 원은 회랑으로 둘러싸여 다른 원과 구획 되었을 테고 입구도 남쪽 개울 쪽으로 따로 마련하여 지금과는 현저히 다른 모습이었던 듯하다.


통도사가 다시 한 번 중흥한 때는 고려 말인 1305년부터 1369년 사이이다.원나라 사신들이 사리(舍利) 친견을 위해 통도사를 방문하고 1326년 에는 인도 승려인 지공이 방문하면서 일대 전기를 맞는다.극락전.약사전.명부전 등 부속 불전들과 일주문.불이문.승방.식당 등 수십 동의 건물들이 신축되었다.일주문과 불이문이 설치되었다는 기록은 3개원을 동서로 관통하는 새로운 통로가 만들어졌음을 의미한다.동쪽 일주문을 거쳐 천왕문으로 들어와 동.서 통로를 통해 하로전과 중로전을 지나 상로전의 대웅전에 이르게되는 현재와 같은 전체 구성틀이 짜여진 것이다.


임지왜란 당시 왜군은 양산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7년간이나 머물렀으니 이 지역 핵심 사찰인 통도사의 피해가 어떠하였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현존 목조 유구들은 임진왜란 이후에 조성되었다.1644년 대웅전 재건을 필두로 극히 중요한 소수의 건물들만 중창되었다.본격적인 중건과 확장은 1725년 부터 1757년 사이에 이루어졌는데 이 기간에 관음전과 해장보각 등이 창건되기도 하였다.


각 원의 배치 형식도 서로 다르다.하로전은 가운데 영산전을 두고 좌우로 약사전과 극락전 그리고 맞은편 만세루 건물 네 채가 마당을 에워싸는 4동중정형 구성을 하고 있다.반면 중로전은 뒤쪽부터 대광명전 - 용화전 - 관음전의 세 건물이 하나의 축선 위에 일렬로 배열된 모습이다.
상로전은 대웅전을 중심에 두고 동서남북 사방에 빈 터를 마련하고 이 네 개의 마당을 명부전.응진전.삼성각 등 부속 불전들이 감싸고 있으며 대웅전 북쪽 마당에 가장 중요한 금강계단이 위치하고 있다.이로써 하로전은 중정을 구성하는 '영역성(領域性)'을,중로전은 하나의 축선을 중시하는 '중축성'을 상로전은 대웅전을 중앙에 둔 '중심성'을 핵심적인 계획 개념으로 염두에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주불전인 대웅전은 동.서.남 3면의 지붕에 박공(朴工)을 가진 특별한 건물이다.남북 3칸,동서 5칸의 규모지만 특별히 어느 면을 정면으로 삼을 수 없어 동.서.남 3면이 모두 정면이 된다.내부공간도 두 개의 건물을 복합시킨 구조여서 특별한 기둥 배열을 볼 수 있다.연꽃이 새겨진 가구식 기단은 늦어도 고려 중기 이전의 작품으로 보여지며 북쪽으로 기단을 2칸 늘린 흔적으로 미루어 현재의 모습과는 달리 원래 대웅전의 규모는 3X3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웅전 내부의 불단에는 불상이 없다.북쪽 벽에 설치된 불단에는 불상 대신 옆으로 긴 들창이 있을 뿐이다.이 들창을 열면 그 뒤에 있는 금강계단의 사리탑이 보이는데 금강계단에 안치된 불사리가 바로 부처이므로 불상을 둘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불사리를 예배하는 법당을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 하며 흔히 이 건물과 같이 내부에 불상을 두지 않는 배전(拜殿)형식으로 구성한다.이 밖에도 대웅전에 가려 있지만 1369년 창건한 명부전, 1677년에 창건한 응진전,1870년에 창건한 삼성각 등도 모두 준수한 상로전의 불전들이다.


중로전의 중심 법당은 가장 뒤에 있는 대광명전이다.창건 연대가 확실치는 않으나 기단과 초석의 척도 분석에 의하면 신라 때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건물은 17세기에 중창된 것으로 보인다.앞면 5칸,옆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집이며 민흘림의 굵은 기둥과 직선적인 첨차의 모양이나 용머리 장식 등 조선 중기의 특징을 충실히 간직하고 있다.대광명전 앞의 용화전은 3칸 맞배집으로 1369년에 창건되었다.가장 앞의 관음전은 1725년에 창건되었고 4면 모두 3칸인 정방형 평면의 건물이다.


하로전의 중심 법당인 영산전은 1740년에 중건된 기록만 있고 창건 연대가 명확하게 밝혀지지가 않았다.이 건물의 전면은 5칸으로 구성해도 될 만한 길이를 3칸으로 구성했기 때문에 기둥 간격이 무척 넓다.주심포 구조의 맞배지붕으로 양 옆 벽에는 한 쌍의 고주를 세워 지붕틀을 지지하였다.


형태나 구조가 고격의 품위를 가지고 있으며 척도 분석에 의해 신라 때 창건된 건물로 추정된다.영산전 서쪽의 약사전은 다포 맞배집,동쪽의 극락보전은 다포 팔작집으로 모두 1369년에 창건되어 18세기에 중건된 법당들이다.


법당은 아니지만 하로전과 중로전의 경계를 이루는 불이문 역시 주목할 만한 건물이다.전면 3칸의 기둥 사이가 상당히 넓어서 기둥 위는 물론 기둥 사이에도 앞뒤로 보를 걸었다.주심보는 왕대공 없이 소슬합장과 결합되었고 주간보는 양쪽에 호랑이와 코끼리 모양의 조각이 받치고 있는 형태인데 다른 건물들에서는 찾을 수 없는 특이한 구조이다.

  *김봉렬 지음 '불교 건축'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