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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처럼 떠나다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부도비귀부와 이수(眞空大師 浮屠碑龜跌.螭首) 본문

☆~ 풍경소리/강 원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부도비귀부와 이수(眞空大師 浮屠碑龜跌.螭首)

푸른새벽* 2006. 10. 31. 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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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과 추함은 언제나 함께 있으니

절터 또한 마찬가지이다

국보나 보물과 같은 석조 유물은 눈여겨볼 만한 것이되

그를 포함하고 있는 그 곳은 그렇지 않다는 편견은 버려야 한다

그들은 서로 같이 있는 것이며

어느 하나로 인해서 다른 하나가 잠시 돋보일 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때때로 바뀐다

오늘과 같은 날의 절터는 제 아무리 빼어난 석조 유물이라고 하더라도

그를 둘러싸고 있는 개망초 꽃에게 그 자리를 내줘야 한다

그가,

돌보는 사람 드문 절터가 아니라 반듯한 절집 마당에 있었더라면

꽃에게 둘러싸이는 호사를 어찌 누릴 수 있었겠는가

그 꽃이 근사한 모습으로 피어나는 귀한 꽃이 아니라

들판에 흔하게 피는 것이면 또 어떤가

 

한 해에 한 차례씩 찾아오는 그의 벗이려니

나는 석조 유물을 제대로 본답시고 함부로 꽃을 꺾거나 짓밟거나 하지 않았다

바람이 불면 넘실거리는 꽃들의 아름다움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속에 그즈넉하게 있는 석조 유물의 아름다움 또한 여느 때와는 달랐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 둘이 서로 어울린 모습은

찾는 이 드문 절터에서만 느낄 수 있는 정취를 유감없이 뿜어냈으니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것이다 *이지누 지음 '절터 그 아름다운 만행'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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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신은 일찌기 도괴되어 중간 부분은 없어진 채

깨어진 조각 4개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절터엔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다

 

고려 태조 23년(940)에 건립한 것으로

귀부의 높이 7.5m,이수 높이 9.9m로 매우 웅장하다

 

본래 이런 구성은 아니었겠으나 현재 지대석이 없는 상태로

근육질이 엄청난 거북의 발이 지면을 꽉 누르고 있다

입을 약간 벌리고 여의주를 문 용머리는 온갖 힘을 기울여 포효하는 형상이며

거북등은 육각형의 귀갑분을 겹으로 조각하고

그 안에 연꽃무늬의 卍 자를 번갈아 단아하게 장식했다

그 위에 높다란 비좌를 마련하고 비신을 얹었겠으나

지금은 귀부위에 바로 이수가 얹혀있다

 

이수의 정면에는 眞空大師란 쓰인 제액(題額)이 있으며

탑비 주인의 휘호로 새긴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진공대사탑비귀부및이수(眞空大師塔碑龜跌.螭首)


보물 제463호 
강원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517-2 


흥법사터에 남아 있으며,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활약한 승려인 진공대사(869∼940)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비문이 새겨진 몸돌은 깨어진 채 경복궁으로 옮겨놓아 이 곳에는 비의 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 있다.


진공대사는 장순선사(長純禪師)밑에서 승려가 되었으며, 당나라에서 수도하고 공양왕 때 귀국한 후 왕의 스승이 되었다. 고려 건국 후에도 태조가 그의 설법에 감화하여 스승으로 머물기를 원하였으나, 이를 사양하고 소백산으로 들어가 수도하였다. 태조 23년에 입적하니 태조가 손수 비문을 짓고, 최광윤이 당나라 태종의 글씨를 모아 비를 세웠다.


비를 이고 있었던 돌거북은 거북이라기보다 용에 가까운 머리를 하고 있으며,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네 발로 바닥을 힘차게 딛고 있다. 목은 짧고 등껍질 무늬는 정육각형에 가까운데 그 안에는 만(卍)자 무늬와 연꽃이 새겨져 있다.


머릿돌은 앞면 중앙에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고, 그 주위에는 구름 속을 요동치는 용을 조각하였다. 용 두 마리가 서로 무섭게 노려보고 다른 두 마리는 양 귀퉁이에서 옆을 쳐다보고 있다. 뒷면에도 네 마리의 용이 사방을 주시하고 있는데, 웅장한 기운이 넘치면서도 섬세하게 조각되어 당시의 높은 예술수준이 엿보인다.


경복궁에 있는 비의 몸돌은 여러 개의 조각으로 깨져있어 부분적으로 비문을 알아보기가 힘든 상태이나, 대체로 대사의 생애와 업적 등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