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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처럼 떠나다

경복궁(景福宮).서울 종로 본문

☆~ 바람소리/궁궐(宮闕)

경복궁(景福宮).서울 종로

푸른새벽* 2006. 11. 10. 23:59

                                                     *광화문(光化門)

 

 

 

 

                                                       *흥례문(興禮門)

 

 

 

 

                                                     * 근정문(勤政門)

 

 

 

 

                                                      * 근정전(勤政殿)

 

 

 

                                              

                                                      * 사정전(思政殿)

 

 

 

 

                                                        *강녕전(康寧殿)

 

 

 

 

                                                      * 교태전(交泰殿)

 

 

 

 

                                                      * 자경전 (慈慶殿)

 

 

 

 

                                                    *수정전(修政殿)

 

 

 

 

                                                     * 경회루(慶會樓)

 

 

 

 

                                                   * 향원정(香遠亭)

 

 

 

 

                                                 *동십자각(東十字閣) 

 

개경(開京)에서 새로운 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즉위한 이듬해 3월 국호(國號)를 '조선(朝鮮)'으로 정한 다음

우여곡절 끝에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기로 했다

 

이에 1394년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여 새 나라 새 도읍의 궁궐을 창건하기 시작했으며 그 이듬해(1395년 9월)에 완공하였다

 

공사는 영삼사사(領三司事)심덕부(沈德浮)가 총감독을 맡았다.이때 창건된 새 궁궐의 규모는 390여 칸으로 그리 크지 않았다

 

이렇게 새 궁궐이 창건된 다음날인 10월 상순,태조가 신궁에서 백관(百官)을 모아 큰 연회를 베풀었는데 이 자리에서

판삼사사(判三司事)정도전(鄭道傳)이 그 이름(宮號)을 지어 올렸다

 

먼저,궁의 이름은 『詩經』「周雅」편에 나오는 '旣醉以酒(기취이주)旣飽以德(기포이덕)君子萬年(군자만년)介爾景福(개이경복)'에서 두 자를 따서 경복궁(景福宮)이라 지었다

 

'이미 술에 취하고 덕에 배부르니 군자 만년 그대로의 큰복을 도우리' 라는 구절에서 따온 '경복'의 의미는 길이길이 크게 복을 누린다는 말로 새 왕조의 번영을 기원하는 것이다.또한 정도전은 연침을 강녕전(康寧殿),동소침을 연생전(延生殿),서소침을 경성전(慶成澱),보평청을 사정전(思政澱), 그리고 정전을 근정전(勤政殿),동루를 융문루(隆文樓),서루를 융무루(隆武樓) 전문을 근정문(勤政門),오문을 정문(正門)이라 각각 이름 지었다

 

그러나 태조의 한양천도 이후 불과 만 5년이 지나지 않아 정종이 다시 개경을 도읍으로 옮기면서(1399년) 경복궁은 방치되다시피 하였다

 

개성에서 정종에게 왕위를 양위 받은 태종은 다시 6년 8개월 만에 한성으로 재천도(1405년 10월)를 단행한다.경복궁이 조선 왕조의 정궁(正宮)의 지위를 되찾게 되었다

 

태종은 경복궁 안에 연못을 크게 파고 장대한 누각을 세워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외국의 사신을 접대할 수 있도록 하였으니 곧 경회루(慶會樓)이다.또 그 연못을 파낸 흙으로는 침전 뒤에 아미산(峨嵋山)이라는 인공 동산을 조성하였다.그러나 태종은 창덕궁(昌德宮)을 건립하여 주로 그곳에서 거쳐하다가 1411년(태종 11년)8월에야 경복궁으로 이어(移御)하였다.이는 왕위계승과 관련하여 이복  동생들인 방석,방번과 치적 동지였던 정도전 등의 개국 공신들을 살육한 현장이 경복궁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근정전(勤政澱)에서 즉위식을 올린 세종은 이곳에 집현전(集賢殿)을 두어 학문하는 신하들을 가까이 두었으며 경회루의 남쪽에는 시각을 알리는 보루각(報漏閣)을 세우고 궁의 서북쪽 모퉁이에는 간의대(簡儀臺)를 설치하였다 .또한 강녕전(康寧殿) 서쪽으로 흠경각을 짓고,그 안에 시각과 사계절을 나타내는 옥루기륜(玉漏機輪)을 설치하는 등 천문과학 시설들을 구축하였다

 

세종 9년에는 동궁으로 자선당(資善堂)이 건립되었으며 그 15년에는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을 건립함으로써 궁성의 4문 체계를 완성시켰다.경복궁의 여러 문과 다리의 이름도 세종 때 지었다

 

1553년(명종 8년)에는 강녕전에서 불이나 근정전 북쪽의 전각들 중 경회루와 청연루 등 몇 채만 남기고 대부분이 소실 되는 큰 불로 번졌다.경복궁 창건 이래 150여 년 만에 겪은 최대의 피해였으나 그 이듬해 대부분 복구 (370여 칸) 되었다

 

그러나 그 로부터 40년이 채 가시지 않아 발발한 임진왜란(壬辰倭亂)은 조선왕조의 정궁 경복궁을 완전히 초토화시키고 말았다.거의 전소되었던 것이다.뿐만 아니라 종묘.창덕궁.창경궁 등도 모두 불타는 참변을 겪었다

 

임진왜란의 병화로 폐허가 된 경복궁은 이후 273년 동안을 그렇게 버려진 궁궐터로 남아 있게 된다.전쟁이 끝나 몽진에서 돌아온 선조는 들어갈 궁궐이 없어 지금의 경운궁 자리에 있던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옛 사저로 그의 증손 양천도정(陽川道正)이 살던 집을 행궁으로 삼고 정사를 살폈다.임진왜란은 경복궁 뿐만 아니라 창덕궁.창경궁도 모두 불태우고 허물어뜨렸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이후 완전 소실 된 채 273년의 세월이 지난 1865년(고종 2년) 4월,경복궁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하응(李昰應)의 강력한 의지로 여타 궁궐의 격식을 훨씬 능가하는 대규모로 중건 공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극심한 재정 궁핍및 공사중의 화재등 우여곡절을 겪으며 고종 4년 11월에 이르러서야 완공을 보게 된다.고종은 대왕대비,왕대비,대비등을 모시고 낙성된 근정전에 나아가 백관의 조하(朝賀)를 받았다.이때의 전각규모는 7225칸 이었으며이후 후원에 들어선 융문당(隆文堂)등의 전각도 256칸 이었으니 그 총규모는 7481칸에 달하였다.궁성 담장의 둘레는 1813보였다.공사 비용은 모두 770만 냥이 소요되었다

 

경복궁이 완공되고 나서 8개월이 지난 고종 5년 7월 초 이틀에 그때까지 창덕궁에서 거쳐하던 고종이 경복궁으로 입거(入居)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일제를 비롯한 서구 열강들의 세력 다툼으로 나라가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다.그 소용돌이  속에서 건청궁(乾淸宮)에 거처하고 있던 명성왕후(明成王后)민씨(閔氏)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되는 천인공노할 사건이 발생한다.1895년의 을미사변(乙未事變)이다.이에 고종은 경복궁으로 이어한 지 28년 만인 1896년에 러시아공관으로 아관파천(俄館播遷)하면서 경복궁은 다시 주인 잃은 빈 궁궐로 전락하였다.고종은 아관파천 이후 경복궁으로 거쳐를 옮겼으며 순종도 즉위 후 주로 창덕궁에서 거쳐하였다

 

일본 군대의 경복궁 난입으로 1895년 8월의 명성왕후 시해사건이 자행되면서부터 조선왕조의 정궁,경복궁의 치욕은 시작된다

 

1910년의 경술국치를 분수령으로 일제는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하는 상징적 공략 대상을 경복궁으로 삼았다.1911년에는 아예 경복궁 부지와 소유권 마저 조선총독부로 가져감으로써 한 왕조의 궁궐을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였다.결국,경복궁의 수많은 전각들이 무참하게 헐려 나갔다.일부는 건축 자재가 되어 일본인들에게 불하.방매되었다.건춘문 안에 있던 정현각(正顯閣)을 헐어 장충동 남산장별장을 짓는 등 4000여 칸을 훼멸하였던 것이다.1915년 9월부터 50일 동안 개최되었던 소위 '시정오년기념조선물산공진회'는 그나마 남아 있던 왕궁으로서의 경복궁의 면모를 끝없이 추락시켰다각종 진열관 등을 신축하면서 정전.편전.침전 일곽을 제외한 거의 모든 전각들을 철거하였던 것이다.또한 공사의 편의를 위하여 궁성 동쪽 건춘문에서 서쪽 영추문에 이르는 횡단도로를 내기도 하였다.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탑 등을 수집해와 궐내에 전시함으로써 이념적으로도 경복궁의 정통성을 유린하였다.더욱 어이없는 후안무치의 행위가 당시 총독 데라우찌에 의해서 자행되었다.근정전 용상에 앉아 경과 보고를 받고 공진회 개최사를 읽었던 것이다

 

1918년 부터는 근정전.사정전.천추전.만춘전 등의 정전,편전까지도 고적(古蹟)전시실로 사용하였다.1926년,마침내 식민 침탈의 상징인 조선총독부가 근정전을 가로막아  거대한 석조 건물로 완공된다.일제는 다시 광화문을 없애려 했다.그러나 강력한 반대 여론에 부딪히자 건춘문 북쪽으로 광화문을 옮겨 지었다

 

1929년에는 신무문 밖에  있던 융문당.융무당.경농재 등이 헐렸는데 그 재목들은 일본인이 짓는 사찰의 자재용으로 팔렸다

 

1932년에는 역대 임금의 어진(御眞)을 모시던 선원전이 철거되어 장충동에 박문사(博文寺)를 건립하는 데 활용되었다.박문사는 이토 히로부미의 명복을 빌기 위한 사찰이었다

 

1935년에는 건청궁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대한제국병탄25주년기념박람회장' 을 세웠다

 

이로써 경복궁 안에는 겨우 근정전.사정전.천추전.만춘전.수정전.자경전.협길당.집옥재.팔우정.집경당.함화당.재수합.경회루 등과 근정문.건춘문.신무문.동십자각 등만 남게 되었다

 

이렇듯 경복궁은 중건된 지 불과 반세기여 만에 그 원래 전각의 10/1도 남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인위적으로 훼멸당하고 말았던 것이다.제국주의 일본의 이러한 야만적,비분명적 파괴 행위는 인류문화사에 부끄럽고 욕된 기록으로 영원히 남아 마땅하다

*이덕수 지음 '新 궁궐기행'중에서*

 

지금 남아 있는 경복궁의 전각은 대부분 고종 때 중건된 것들과 1980년대 이후 기본 궁제에 따라 복원된 것들이다.본격적인 경복궁 복원은 1990년부터 추진되어 강녕전.교태전 등과 동궁 소속의 비현각이 복원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 들어섰던 조선박물관이 철거되었고 옛 태원전터에 있었던 30경비대 또한 그자리를 떠났다

 

1996년에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였으며 2001년 그 자리에 홍례문 일곽과 영제교를 복원하여 오늘날에 이른다

 

현재 경복궁은 정문인 광화문을 지나 홍례문,영제교를 지나면 기능에 따라 영역이 나타난다.외전 영역에는 근정문.근정전이 있고 내전영역에는 사정전.만춘전.천추전.경회루.강녕전.연생전.경성전.함원전.흠경각.교태전이 있다.생활주거공간 영역으로 자경전.집경당.함화당이 있으며 그 밖에 후원 영역에는 향원정.집옥재.협길당.팔우정 등의 건물이 있다

 

그리고 이 모두를 감싸고 있는 궁궐의 담,즉 재성(在城)의 사방으로 문이 하나씩 있으니 남쪽의 광화문,북쪽의 신무문,동쪽의 건춘문,서쪽의 영추문이 그것이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경복궁(景福宮)


사적 제117호
서울 종로구 세종로 1 


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곳으로 태조 3년(1394)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세웠다.

 

궁의 이름은 정도전이 『시경』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에서 큰 복을 빈다는 뜻의 ‘경복(景福)’이라는 두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1412년 태종은 경복궁의 연못을 크게 넓히고 섬 위에 경회루를 만들었다. 이 곳에서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외국에서 오는 사신을 대접하도록 하였으며, 연못을 크게 만들면서 파낸 흙으로는 아미산이라는 동산을 만들었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주로 경복궁에서 지냈는데, 집현전을 두어 학자들을 가까이 하였다. 경회루의 남쪽에는 시각을 알려주는 보루각을 세웠으며, 궁의 서북 모퉁이에는 천문 관측시설인 간의대를 마련해 두었다. 또한 흠경각을 짓고 그 안에 시각과 4계절을 나타내는 옥루기를 설치하였다.

 

임진왜란(1592)으로 인해 창덕궁·창경궁과 함께 모두 불에 탄 것을 1867년에 흥선대원군이 다시 세웠다. 그러나 1895년에 궁궐 안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왕이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었다. 1910년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건물을 헐고, 근정전 앞에 총독부 청사를 짓는 등의 행동을 하여 궁의 옛 모습을 거의 잃게 되었다.

현재 궁궐 안에 남아있는 주요건물은 근정문·근정전·사정전·천추전·수정전·자경전·경회루·재수각·숙향당·함화당·향원정·집옥재·선원정 등이 있다.

 

중국에서 고대부터 지켜져 오던 도성(都城) 건물배치의 기본형식을 지킨 궁궐로서, 궁의 왼쪽에는 역대 왕들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가 있으며, 오른쪽에는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이 자리잡고 있다. 건물들의 배치는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거나 왕이 신하들의 조례를 받는 근정전과 왕이 일반 집무를 보는 사정전을 비롯한 정전과 편전 등이 앞부분에 있으며, 뒷부분에는 왕과 왕비의 거처인 침전과 휴식공간인 후원이 자리잡고 있다. 전조후침(前朝後寢)의 격식인데, 이러한 형식은 이 궁이 조선의 중심 궁궐이므로 특히 엄격한 규범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비록 궁궐 안 대부분의 건물들이 없어지기는 하였지만, 정전·누각 등의 주요 건물들이 남아있고 처음 지어진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조선의 정궁의 모습을 대체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