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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光化門).서울 경복궁 본문

☆~ 바람소리/궁궐(宮闕)

광화문(光化門).서울 경복궁

푸른새벽* 2006. 11. 11. 23:49

 

 

 

 

 

 

 *세종로에서 바라 본 광화문

 

 

 

 *광화문 편액

 

 

 

 *광화문 석축 바깥쪽 꼭대기.

여장 밖 좌우 귀퉁이에는 돌짐승을 앉혔다

자그마하지만 추녀 아래서 왕조의 정궁을 지키려는 기개만은 당당하다

 

 

 

 *광화문 좌우에 있는 해태상

해태를 광화문에 앉힌 이유는

풍수에 따라 마주 바라보이는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해서였다

 (해태의 이미지는 빌려왔음~ㅎ)

 

 

 *광화문의 문루로 오르는 돌계단

석축 위에 여장을 둘러쌓고 동서 양쪽에 문을 내 출입토록 하였다

 

광화문(光化門)

 

경복궁의 정문,광화문은 창건 당시 오문(午門) 또는 정문(正門)으로 불렸다

 

정도전은 오문의 의미를 "닫아서 이상한 말과 사특한 백성을 막고 열어서 사방의 현인들을 들어오게 하는 것은 모든 바른 것 중에서도 큰 것입니다" 라고 태조께 아뢰었다

 

창건되었을 당시 광화문의 규모와 상세한 모습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 문이 광화문으로 명명된 때는 세종 8년이며 세종 16년에는 새 종을 주조하여 달았다

 

'光化'라는 의미는 '光被四表 化及萬方'에서 따왔다고 한다.집현전 학자들이 이름을 붙였는데  그 의미는 '나라의 위엄과 문화를 널리 만방에 보여준다'는 것이다

 

광화문 역시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당시 새로 세웠다.조선왕조의 정궁 경복궁의 정문으로 왕실과 국가의 권위를 상징하던 광화문은 그러나 1926년 조선총독부 청사가 건립되면서 제 자리를 잃게 되었다.일제의 문화 말살 정책과 맞물려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졌던 것이다

 

광화문은 조선시대의 궁궐 대문 가운데 유일하게 궐문의 형식을 갖추었다.돌로 육측을 높이 쌓고 무지개문(홍예문) 셋을 내어 3문 형식을 취하였는데 가운데 칸이 양 옆 칸보다 조금 더 넓고 높다

 

문짝은 좌우 두 짝씩인데 원래는 바깥쪽 문짝에 무장(武將)그림을 그렸다고 한다.가운데 칸은 임금과 왕비가 출입하던 어칸(御間)이고 동쪽 칸으로는 문신들이,서쪽 칸으로는 무신들이 드나들었다

 

광화문의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구성되었으며 우진각 지붕을 올린 중층 건물이다.공포 외이출목 내삼출목인 다포계이며 안쪽의 처리는 운궁을 사용하였다.기둥은 모두 두리기둥인데 아래층 기둥 사이는 개방하였고 위층에는 판문을 달아 여닫을 수 있게 하였다.아래위층 모두 겹처마이고 지붕의 각 마루는 양성을 하지 않고 취두(鷲頭)와 용두(龍頭) 잡상(雜像)을 배열하여 장식하였다

 

광화문 앞 좌우에는 해태 한 쌍이 앉아 있다.해태를 광화문 앞에 앉힌 이유는 풍수에 따라 마주 바라보이는 관악산(冠岳山)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해서였다.해태의 목에는 방울이 하나씩 달려 있는데 이는 화마(火魔)가 닥치면 저절로 울어 알려 달라는 기원의 의미가 숨어 있다

*이덕수 지음 '新 궁궐기행'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