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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동래 범어사 (5)
바람처럼 떠나다
범어사팔상.독성.나한전(梵魚寺八相.獨聖.羅漢殿) 금정구 유형문화재 제63호 부산 금정구 청룡동 정면 7칸, 측면 1칸 규모에 겹처마, 맞배지붕인 본 건물은 현재 범어사 대웅전 서쪽 상단에 위치하고 있는 부속 불전의 하나로,적어도 1706년 이래로 존속했던 위치에서 변함없이 존속해 온 건물이다. 1902년에 조사된 자료에 의하면 당시까지는 중앙의 천태문(天台門)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각 팔상전과 나한전이란 별개의 건물이 서 있다가,1905년 11월~1906년 11월까지 약 1년에 걸친 공사 끝에 현재의 모습으로 새롭게 단장되었다. 따라서 서측의 팔상전 부분과 동측의 나한전 부분의 건축 형식은 변형되거나 고쳐지지 않고 1906년 중건 이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보여 지며,다만, 팔상전과 나한전의 노..
동치원년명범어사금고(同治元年銘梵魚寺金鼓) 금정구 문화재자료 제5호 부산 금정구 청용동 금고란 절에서 사용하는 도구로서 대중을 불러모으거나,급한 일을 알리는데 사용하는 금속으로 만든 타악기이다. 범어사 금고는 지름 90㎝, 두께 15㎝의 대형 금고이다.옆면은 뒷면을 향해 안으로 기울어진 좁은 입구를 가진다.앞면에 동심원이 새겨 있을 뿐 전체적으로 무늬가 없다.옆면에는 3개의 고리가 달려있으며, 만들어진 때와 금고에 대한 기록이 새겨 있다.이 글로 보아 동치(同治) 원년인 조선 철종 13년(1862)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금고는 조선 후기에 제작된 대형 금고인 동시에 만든 시기가 명확한 중요한 자료이다. 범어사 대웅전 우측 문 앞에 걸려 있는 금고(金鼓)는 고려시대에 가장 많이 조성된 일반적인 금..
범어사삼층석탑(梵魚寺三層石塔) 보물 제250호 부산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 대웅전 앞에 있는 석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이 탑의 특징은 탑의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에서 찾을 수 있는데, 위·아래층 기단의 옆면을 기둥 모양으로 장식하지 않고..
범어사 당간지주(梵魚寺 幢竿支柱) 범어사는 통일신라시대 창건된 것으로 전하고 있으며 화엄십찰의 하나로 왜구를 진압하는 비보사찰(裨補寺刹)이었다.당간지주는 사찰로 진입하는 공간에 세워져 있는데,일주문 못 미쳐 오른편에 서 있다.현재의 위치가 원위치로 추정되며,그 위치로 보아 경내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당간지주를 거치도록 범어사가 조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현재 기단부는 결실된 상태인데,지주 하부 치석 수법으로 보아 지주 하단부를 깊게 매몰하여 세우고 별도의 정연한 기단은 시설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지주부는 규모가 상당하여 웅장한 인상을 주고 있다.그런데 지주면은 정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고 각 면이 고르지 않아 거칠게 다듬어졌음을 알 수 있다.또한 모서리 부분도 모죽임을 하지 않아 평면 사각 석주형을 하고 ..
금정산 범어사(金井山 梵魚寺)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546번지 부산의 금정산에는 부산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절집 범어사가 있다. 「범어사 창건 사적」에는 의상대사가 범어사를 창건한 이야기가 이렇게 적혀 있다.요약을 하면 다음과 같다.신라 흥덕왕 10년(835) 동쪽 해안에 왜구가 10만 병정을 거느리고 나타나 위협하였다.그때 왕의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의상대사로 하여금 금정산에 가 기도토록 하면 왜구가 물러날 것이다"라는 진언을 하는 고로 그대로 했더니 과연 왜구가 물러났으며 이를 기리기 위해 범어사를 창건하였다는 것이다.그러나 702년에 입적한 의상대사가 130여 년이나 뒤인 835년에 다시 나타나 절을 지을 수 있을까?.비록 앞뒤가 맞지 않은 얘기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범어사가 의상대사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