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바람처럼 떠나다

교태전(交泰殿).서울 경복궁 본문

☆~ 바람소리/궁궐(宮闕)

교태전(交泰殿).서울 경복궁

푸른새벽* 2006. 11. 19. 00:00

 

 

 

 

교태전(交泰殿)


강녕전 북행각에 솟을 삼문으로 세운 양의문을 들어서면 교태전(交泰殿)이다.왕비의 시어소(時御所) 즉,내명부(內命婦)의 일들을 살피던 전각이자 침전으로 중궁(中宮)또는 중전(中殿)이라고도 했다.이는 또한 왕비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단층 남향인 이 건물의 규모는 정면 9칸 측면 5칸이며 장대석 네벌대로 기단을 쌓고 네모 뿔대로 다듬은 초석을 놓아 네모기둥을 세웠다.기단 앞에는 가운데 세 칸에 맞추어 세 틀의 돌계단을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하였는데 소맷돌은 없다.기둥머리에 창방을 결구한 다음 이익공으로 공포를 올렸으며 처마는 겹처마이다


교태전은 동쪽으로 원길헌(元吉軒)을,서쪽으로 건순각(健順閣)을 익각으로 거느리고 있다.건물 앞면은 교태전의 좌우로 원길헌과 함흥각이 이어지고 이는 다시 행각으로 연결되어 ㅁ 자 형태를 하고 있다.교태전에서 원길헌,함흥각으로 연결되는 부분에는 샛문을 달았다.교태전은 왕비의 침전답게 경복궁 전각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웠다고 한다.복원된 교태전도 단청과 창호와 꽃담장이 화려하다.강녕전과 마찬가지로 지붕에는 용마루가 없다


건물 평면은 가운데 3칸에 마루를 깔아 대청을 놓고 그 좌우로 각각 2칸에는 온돌방을 배치하였다.대청 앞 툇간3칸은 개방하였다.지금은 아니지만,좌우로 온돌방은 원래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칸막이가 되어 있었는데 가운데 방은 정사각형 모양이고 나머지 둘레방은 좁고 긴 형태였다고 한다.이 가운데 방에서 임금과 왕비가 주무시고 둘레 방에서는 상궁들이 밤새 지켰다고 한다.다만,임금과 왕비의 머리가 향하는 동쪽 방은 비워 두었다고 한다.또한 임금 부부가 합궁(合宮)을 하는 동안은 젊은 상궁들은 밖으로 나가고 나이많은 상궁 3명이 자리를 지켰다고 한다.이때 가운데 방은 당연히 문을 닫았지만 나이든 상궁들이 지키고 있던 둘레 방은 모든 문을 개방하여 서로를 감시할 수 있게 하였다고 한다.아무튼 임금은 무치(無恥)라고 했다


개국 당시 경복궁을 창건할 때는 교태전을 짓지 않았으며 세종 연간에 건립되었다.강녕전과 마찬가지로 명종 때의 화재로 불탔다가 재건되었으나 역시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고종 시절에 중건되었다.그러나 1917년 창덕궁 내전이 불에타자 교태전을 헐어서 그 재목을 대조전(大造殿)복원에 사용하였다.지금의 건물은 1990년대에 중건한 것이다


경복궁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입지해 있는 교태전.교태전으로 들어가는 양의문의 '兩儀'와 교태전의 '交泰'는 곧 음양의 조화와 남녀의 교합(交合)을 의미한다.따라서 왕비의 정전으로서 음양의 조화를 이루어 생산(生産)이 순조롭기를 기원하는 뜻이 숨어 있다

*이덕수 지음 '新궁궐기행'중에서

 

 

 

 

 

 *강녕전에서 교태전으로 드는 양의문(兩儀門)

양의(兩儀)란 말은 양과 음,하늘과 땅 즉, 음양의 조화를 의미한다.솟을 삼문의 좌우로 각종 무늬 및 글자로 장식한 굴뚝을 배치하고 행각 지붕 위로 연가를 얹었다 

 

 

 

 

 

 

*교태전의 동익각 원길헌

교태전은 원길헌 외에도 서익각으로는 함흥각을,북익각으로는 건순각을 거느리고 있다

 

 

 

 

 

 

*교태전 쪽마루에서 익각으로 건너가는 샛문

 

 

 

 

 

 

 

 *교태전의 완자살 창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