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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가야산 해인사(伽倻山海印寺).경남 합천 본문

☆~ 절집.절터/경 남

합천 가야산 해인사(伽倻山海印寺).경남 합천

푸른새벽* 2006. 12. 5. 23:56

 

 





 





 





 





 





 





 









 

 





 





 





 





 





 





 





 









 

 









 





 

 





 





 





 









 

 





 





 





 





 





 





 





 





 





 





 

가야산 해인사(伽倻山海印寺)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번지


법보사찰 해인사의 비중은 비단 오늘날뿐만 아니라 처음 출발부터 매우 무거운 것이었다.통일 후의 신라 사회를 지탱한 이데올로기는 화엄 사상이었으며 화엄교학으로 무장한 화엄종 승려들은 이데올로그들이었다.그리고 그 화엄사상을 생산하고 전파하는 연구소,혹은 전진기지라고 할 수 있는 것이 화엄종 사찰이었으며 그 선두에 열 군데의 화엄종 사찰,즉 화엄십찰(華嚴十刹)이 있었다.해인사는 이 화엄십찰 가운데 하나로 창건되었다.


이렇게 터전을 닦은 절을 '해인사'라고 이름지은 까닭은 무엇인가? 화엄종의 근본경전인 화엄경, 곧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에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말이 나온다.


우리들 마음의 바다에서 번뇌라는 가지가지 물결이 일고 있는 것은 지혜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라는 바람이 불고 있기 때문이다.그 어리석음의 바람이 잦아들고 번뇌의 물결이 쉬어지면 참 지혜의 바다(海)에는 흡사 도장을 찍듯이(印) 무량한 시간,무한한 공간에 있는 일체의 모든 것이 본래의 참모습으로 현현하게 된다.이것이 바로 해인삼매이자 부처가 이룬 깨달음의 내용이며 우리들이 돌아가야 할 참된 근원이요 본래 모습이다.해인사라는 절 이름은 바로 이 말에서 따온 것이니 말하자면 화엄경의 내용을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이름인 셈이다.


조선조에 들면서부터 내리막길을 걷는 불교 사태 속에서도 해인사는 왕실의 비호 속에 온존하다가 성종대에 들어서는 오히려 사세를 키우는 계기를 맞는다.1488년 인수,인혜 두 왕대비가 세조비 정희왕후의 유명을 받들어 당대의 고승 학조스님으로 하여금 해인사를 대대적으로 중창케 하겨 1490년에 공사를 마쳤던 것이다.


이때 세워전 각종 건물의 총 칸수가 160칸이었다.성종대왕의 중창으로 오늘날 우리가 보는 해인사의 틀이 잡혔으리라 생각한다.하지만 이때의 모습이 지금까지 전해지지 않음은 물론이다.임진왜란 때도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던 해인사는 1695년부터 1871년까지 176년 사이에 짧게는 1년,길게는 수십 년의 간격으로 무려 일곱차례나 크고 작은 화재가 발생하여 여러 번 제 모습을 바꾸었다.그 가운데 1817년의 대화재는 천여 칸의 건물을 불태웠다고 한다.


이렇게 화재로 불탄 해인사를 복구한 모습이 이전 모습보다는 대폭 축소된 형태로 이루어졌고 그때의 모습이 부분적인 변화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른다.


해인사가 자리하고 있는 가야산은 신라시대부터 국가적 제사를 지내던 신성한 산악으로 정견모주(正見母主)를 산신으로 모셨고 신라 말의 염세적 천재 최치원이 이 산으로 들어와 산신이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현재 해인사 진입부에 국사단(國師檀)이라는 건물이 서 있는데 가람을 수호하는 토지신을 모신 곳이다.이는 가야산이 산악신앙,지신신앙,풍류도 등 토착신앙의 성지임을 알려주는 흔적들이다.반면가야산의 이름은 석가모니가 큰 깨달음을 이룬 인도의 부다가야(BuddhaGaya)에서 유래한 것으로 후대에 들어온 불교가 토착신앙을 아울렀던 역사적 궤적을 보여준다.


해인사는 802년 의상의 증손뻘 제자인 순응(順應)에 의해 창건되어 의상계 화엄종의 중요 사찰인 화엄십찰이 되었다.후삼국시대에는 왕건 편에 섰던 '북악파'의 핵심으로 930년 왕건의 복전(福田)이었던 희랑(希朗)대사가 크게 중창하여 전성기를 맞았다.조선 초 팔만대장경을 옮겨 온 후 1488년 대적광전과 장경판전,종루,불이문과 26동의 요사(寮舍)등을 중건함으로써 현재와 유사한 모습을 갖추었다.


가람 전체는 크게 3단으로 나뉘는데 아랫단은 일주문-봉황문-불이문이 연달아 배열된 진입부이다.일주문에서 봉황문에 이르는 경사진 한 줄기 길의 양 옆에 의도적으로 심은 키 큰 소나무들이 자연스럽게 벽을 이루고 그 끝에는 봉황문이 위치한다.봉황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는 국사단이 있고 그 왼쪽 위로 불이문으로 오르는 계단이 중첩된다.3개의 문과 그 사이 공간들은 매우 흡인력 있게 구성되어 최고의 진입공간을 이룬다.


중간단은 구광루와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승방들이 배치된 구역이다.강당인 구광루는 정면 7칸의 긴 건물로 예전에는 아래층의 동쪽 두 번째 칸을 통해 중심 마당으로 출입할 수 있었다.중심 마당에는 육중한 삼층석탑이 서 있는데 석탑은 마당의 정중앙에서 동쪽으로 약간 치우쳐 있다.구광루 밑을 통과하면 마당의 동쪽 모서리에 서게 되는데 이때 동쪽으로 치우친 석탑이 오히려 대적광전의 중앙에 놓인 듯 보인다.그러나 1990녀대 중창불사 때 구광루의 누하 출입을 막아 버렸고 구광루의 기단과 건물의 격식이 변화되어 이처럼 치밀한 공간 계획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화엄종 최고의 부처는 비로자나불이고,비로자나불을 모신 주불전은 대적광전이라고 부른다.해인사 대적광전은 원래 2층 전각이었으나 1917년 단층으로 재건하였다.때문에 내부에 모신 거대한 불상에 비해 천장이 낮아 공간이 답답해 보인다.대적광전 서쪽으로는 나한전 등 보살전들이 산재하여 예불공간을 이룬다.


가장 뒤 편의 높은 단은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장경판전 영역이다.정면 15칸의 긴 건물들이 남쪽과 북쪽에 나란히 놓이고 그 사이의 동쪽과 서쪽에 정면 2칸의 작은 건물들이 세워져 일곽을 이룬다.남쪽 창고를 수다라장이라고 하고 북쪽 건물을 법보전이라 부르는데 이 두건물에는 팔만대장경판들이 보관되어 있다.또한 동서쪽 작은 창고에는 해인사에서 자체 제작한 판본들을 보관하고 있다.


4개의 건물이 이루는 동서로 긴 마당은 다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낯선 외부공간으로 해인사 진입로의 좁고 긴 공간을 90도 틀어놓은 것 같은 모습이다.


수다라장과 법보전은 1488년 창건된 건물로 유일하게 현존하는 조선초의 창고 건물이다.정면 15칸,측면 2칸의 각 165평 규모이며 날카로운 초각을 가진 초익공계 구조이다.지붕은 우진각지붕이며 내부 환기를 위해 기둥 사이 각 칸 위아래에 살창을 설치하였다.이 살창은 크기와 위아래 조합 배열이 두 건물의 앞뒷면 모두 다르게 짜여져 있다.


경판전은 보물 중의 보물인 대장경판을 보관하는 창고이기 때문에 통풍과 환기가 가장 중요하다.환기창의 모양과 크기를 각 면마다 달리한 까닭도 내부 공기의 원활한 흐름을 고려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또한 내부 바닥은 흙바닥 아래에 숯과 횟가루,소금을 섞어 다져 습도를 조절하고 해충을 방지할 수 있게 하였다.또한 동.서 판고 건물은 아예 벽면 전체를 살창으로 처리하였다.


이러한 여러 가지 장치를 통해 경판들을 오랜 세월 원형대로 보존할 수 있었다.실제 실내 환경을 측정한 결과 내부 온도는 외부에 비해 0.5~2도 낮게 유지되며 습도 역시 5~10%정도 낮게 유지되는 것으로 밝혀졌다.또한 경판전은 경판들을 보관하는 내부 판가들을 건물 구조체와 일체화하는 방법을 취해 구조적 안전도 꾀하고 있다.
*참고서적: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
              김봉렬 지음 '불교건축'.'가보고싶은 곳 머물고 싶은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