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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 법수사지(法水寺址).경북 성주 본문

☆~ 절집.절터/경 북

성주 법수사지(法水寺址).경북 성주

푸른새벽* 2006. 12. 7. 23:41

  









 

 





 









 

 





 





 









 





 

 









 

 





 





 





*법수사터에 남아 있는 석물들

탑 앞에는 석등의 하대석,뒤편에는 불상의 대좌

그리고 주변 밭둑에는 주춧돌과 통돌을 다듬어 만든 배례석 등이 흩어져 있다

 

 

 법수사터(法水寺址)


법수사는 신라 애장왕 3년인 802년에 세워진 화엄 사찰이었다.창건 당시에는 금당사(金塘寺)라 했다지만 언제부터 법수사가 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전하는 이야기로는 1000여 칸이 넘는 건물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고 주변 암자만도 100곳이 넘었다지만 그 흔적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막내아들인 범공(梵空)이 스님이 된 후 머물렀는가 하면 고려 광종 때에는 의상 대사로부터 이어지는 화엄의 큰 인물이자.성상(性相)융희(融會)의 화엄종풍을 드날리던 균여(均如)도 귀법사와 개태사 그리고 법수사에 머물며 화엄종을 진작시켰다.그 후 고려 예종 때 왕사를 지낸 원경(元景)스님이 주지를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학자들이 법수사를 찾아 글을 남긴 시기가 고려말,조선초에 집중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그 즈음이 법수사의 법등이 가장 활활 타올랐던 시기라고 봐야 할 것이다.그 후,조선 중기 임진왜란 후로는 글을 찾을 수 없으니 임란 당사 폐찰이 된 것으로 보인다.더구나 법수사는 승병들의 근거지로 알려졌으니 온전하게 남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지금 해인사 대적광전의 주존불인 비로자나불이 본디는 이 곳 법수사의 주존불이었다.폐사가 되자 불상은 인근 용기사(龍起寺)로 옮겨졌으나 그 마저 폐사되자 고종 광무 1년인 1897년에 당시의 해인사 주지 범운(梵雲)선사에 의해 다시 옮겨졌다고 한다.또한 절터 뒤의 용기골로 들어가는 입구의 미륵당에 있던 불상은 1967년 경북대학교박물관으로 옮겨졌으니 절터에는 경북 지방문화재 67호인 삼층 석탑과 86호인 당간지주 그리고 탑 근처에 불상 좌대였을 연화문이 새겨진 석물만이 남아 있다.


당간지주 앞에는 연화문이 새겨진 배례석,탑 앞에는 석등 받침이었을 법한 석물이 있으며 또 천도재를 마친 후 잡귀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며 경을 읽던 연화문이 새겨진 시식대(施食臺)가 인근 식당 마당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이지누 지음 '절터 그 아름다운 만행'중에서*



 

성주 법수사지(星州 法水寺址)


경북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 1214, 1215


경북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에 있다.사역은 중기마을에서 997번 도로와 접한 지역이다.


신라 애장왕 때 창건된 대규모 사찰로,임진왜란 이후 폐사되었다고 한다.『海印寺誌』에 이곳에 있던 비로자나불상과 보살상을 龍起寺

로 옮겼다가,1897년 다시 범운선사가 대적광전에 주존으로 봉안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三國遺事』 券 第2 紀異 金傳大王 條에는 법수사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고,『拙藁千百』,『東國輿地勝覽』 卷28 慶尙道 聖州牧 佛宇

條,『與地圖書』,『聖州誌』,『京山誌』,『朝鮮寰輿勝覽』,『梵宇攷』에 '伽倻山南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변은 경작지로 개간되었고,삼층석탑과 지름 220cm의 대형 연화대석이 남아 있다.사역은 사방 각 150m로 추정되며,전체 사역은 크게

3단으로 나뉜다.마을 뒤쪽 국도와 접한 지역이 최상단으로 높이 5~6m 내외,길이 118m가량의 'ㄱ'자형 석축대로 터를 형성하였다.
한 단 아래의 경작지에는 많은 양의 와편이 산재해 있고,건물지로 보이는 아랫단에는 대형 초석들이 남아 있다.


주변 민가에서 계단 석재와 면석이 일부 확인된다.사지에 있던 석불은 경북대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한국사지총람자료*